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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정엽 Aug 18. 2020

도로와 운하에 관한 보고서

앨버트 갤러틴 4

루이지애나 매입 이후 루이스 클라크 탐험대(Lewis and Clark Expedition)에도 깊은 관심을 갖고 지원했다.


계획의 수립부터 활용 방법까지 심도 있게 고민하고 논의했다.


루이스 클라크 탐험대 경로  <출처 : 위키피디아>



연방정부의 토지 문제와 1812년 토지청 신설


갤러틴은 탐사가 끝난 지역의 토지를 합법적으로 매각하여 세수의 증대를 희망했다.


단순히 세금의 인상으로 국민에게 부담을 주는 방식이 아니었다. 꾸준하고 근본적인 연방정부 재정을 늘리려 한 것이다.


물론 해밀턴도 유사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둘 다 성공하지는 못했다.


당시 토지의 투기 세력에 대한 확실한 해결책과 이를 관리 감독할 부서가 별도로 존재하지 못했다. 갤러틴은 먼저 토지에 관한 전문 부서를 만들려고 했다.  



토지 관리국 로고  <출처 : 위키피디아>



결국 1812년 토지청(General Land Office, 1812) 이 신설되었다. 이후 토지관리국(Bureau of Land Management)으로 변경되었다.


토지 문제는 갤러틴이 중점적으로 신경을 쓰고 관리한 부분이었다. 연방파에 비해 급진적이고 개방적인 정책을 펴 나갔다.


단순히 토지 매각만을 고려한 것이 아니라 인프라 구축에 노력했다. 내륙 도로 개발과 해안 도시로의 연결을 통해 손쉬운 이동고민했다.


이 노력은 운하를 통해 일부분 실현되었다. 하지만 당시의 기술과 환경으로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운하를 통한 화물의 운송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남북전쟁 시기 철도 건설을 통해 모든 문제점이 해결되었다. 기차를 통해 물류 발전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하지만 해밀턴과 갤러틴은 철도 산업이 생겨나기 이전 사람이었다. 그들이 생각한 최선의 방법은 도로의 개설과 운하 구축이었다.


공공도로와 운하에 관한 보고서


1808년 갤러틴은 이러한 내용을 담은 보고서를 의회에 제출했다.



공공도로와 운하에 관한 보고서  <출처 : 위키피디아>


일명 ‘공공도로와 운하에 관한 보고서(Report of the Secretary of the Treasury, on the subject of public roads and canals)’였다.


그는 1년 여를 매달렸고 연방정부 예산 2,000만 달러의 예산에 대해 상세히 기술했다. 보고서에 4가지 인프라 구축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먼저 북에서 남으로 이어지는 운하의 필요성이었다. 대서양 연안에 따라 구성되는 이 운하는 남과 북의 화물 운송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여줄 것으로 예상했다.


두 번째는 동부와 서부를 오가는 내륙의 교통 개선이었다. 원시적인 도로를 정비하고 애팔래치아 산맥의 장벽을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셋째는 대서양과 오대호, 세인트로렌스 강을 연결하는 운하의 필요성이었다. 이 예로 영국의 강과 운하를 연결한 사례를 들었다.


네 번째는 대륙 운하였다. 항구의 도시와 내륙의 주요 도시를 운하로 연결하는 방식이었다.


1840년 이리운하 지도   <출처 : 위키피디아>


결과적으로 미국의 상업과 공업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물류의 혁신이 필요하다는 뜻이었다. 이를 위해 도로와 운하를 구축해야 한다는 결론이었다.


그는 이 사안을 위해 예산 계획을 수립했다. 연방정부의 시행 외에는 진행할 수 없을 것으로 예측했다.


그의 생각은 맞았다.


주 정부로서는 막대한 건설비가 들어가는 사업을 진행, 유지할 여력이 없었다.


'1812년 미국-영군 전쟁'의 영향


하지만 '1812년 미국-영국 전쟁'으로 막대한 군사비 지출이 이어지면서 시행이 불투명했다.


1812년 미국 - 영국 전쟁  <출처 : 위키피디아>


전쟁이 끝나고 1816년 하원과 상원에서 어렵게 통과되었다. 매디슨 대통령은 거부권을 행사했고 결국 실행되지 못했다.


그의 생각과 계획이 너무도 시대를 앞서간 것이었다.


이 계획은 후 1817~25년까지 진행된 이리운하의 성공을 통해 현실로 이루어졌다.


(‘이리 운하의 개통' 내용은 기 작성된 내용을 참고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아울러 남북전쟁 시 생겨난 철도의 건설로 혁신적인 물류비 절감이 이루어졌다.


그의 계획은 대부분 맞았으나 실행 방식과 산업주체가 시대에 맞게 변화된 것이었다.


이리 운하의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하지만 국도 건설 사업만은 끝까지 밀어붙였다. 후대에 까지 사용될 만큼 성공적인 업적이었다.


국도 건설 사업의 진행과 성과


우여곡절도 많았다.


주 정부의 이익을 위해 세부적인 경로를 시시콜콜 따지는 의원들을 설득했다. 망설였던 제퍼슨 대통령의 마음도 끝내 설득시켜 관철시켰다.


예산을 절감하는 노력을 보여주었지만, 필요한 곳에는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물론 예산 조달 계획도 세워 놓았다.


컴벌랜드 국도 표시   <출처 : 위키피디아>  


당시 건설된 도로를 '국도(National Road)'라고 불렀다. 일명 ‘컴벌랜드 로드(Cumberland Road)’다. 이것은 연방 정부가 건설 한 미국 최초의 주요 고속도로였다.


건설은 1811년 메릴랜드 주 컴벌랜드(Cumberland)에서 포토맥 강 서쪽까지 이어졌다.


이후 1837년까지 이어진 공사로 620마일(1,000km)의 도로는 오하이오 강을 연결했다. 수많은 이주민이 서부로 이동하는 데 사용되었다.


1837년 완성된 국도 <출처 : 위키피디아>


그의 집념과 끈질긴 노력으로 이루어졌다.


미래를 내다보고 추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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