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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정엽 Aug 17. 2020

갤러틴의 업적

앨버트 갤러틴 3

스케치가 발표될 당시,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존 애덤스가 당선되었고, 제퍼슨은 부통령이 되었다.

사실상 연방파의 승리였고, 공화파의 패배였다.


공화파 내에서의 주도적 역할


매디슨은 버지니아로 돌아갔다. 공화파의 하원 의원을 이끌어 나갈 사람은 갤러틴 밖에 없었다.


올리버 월콧 주니어 재무장관  <출처 : 위키피디아>


갤러틴은 워싱턴 행정부에 이어 애덤스 행정부에도 거침없는 공세를 이어갔다.


신임 재무부 장관인 올리버 월콧 주니어(Oliver Wolcott Jr, 1769~1833)를 강하게 압박했다.


사실상 공화파 내 경제통 중 갤러틴만큼 출중한 이가 없었다.


그는 스케치 보고서에 이은 새로운 보고서를 발표했다. 앞서 발표된 보고서의 연장선상이었다.


미국 부채와 세입 및 세출에 관한 의견


제목은 ‘미국 부채와 세입 및 세출에 관한 의견(Views of the Public Debt, Receipts and Expenditures of the United States)’이었다.


당시 프랑스와의 유사전쟁으로 수입 대비 국방비 지출이 늘어나 있던 시기였다.


미국 부채와 세입 및 세출에 관한 의견  <출처 : 위키피디아>


공화파도 국가의 명예를 지키기 위한 군사비 지출은 동의했으나 금액이 너무 컸던 것이다. 이를 지적하고 더 이상 부채가 늘어나면 안 된다는 의견이었다.


덕분에 1800년대 제퍼슨 대통령 시대에는 군사비를 줄이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하게 다.


1800년 제퍼슨 대통령 시대와 재무부 장관 임명


1800년 드디어 제3대 대통령인 토머스 제퍼슨 시대가 열렸다. 


갤러틴은 재무부 장관으로 임명받았다. 1801년 5월에 업무를 시작했다.


국무장관 매디슨   <출처 : 위키피디아>  


제퍼슨 대통령과 국무장관 매디슨, 갤러틴은 공화파의 3인방으로 2가지 정책을 정했다.


하나는 원활한 행정 집행을 하기 위해 의회의 다수당이 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연방정부 부채를 획기적으로 줄이는 것이었다.


부채를 줄이기 위한 세 가지 방법도 마련했다.


예산 지출을 줄일 것, 특별 지출 항목에 대해 관리감독을 철저하게 할 것, 군사비 지출 축소와 해군 증강을 포기하는 것이었다.



갤러틴의 초상(1805년)   <출처 : 위키피디아>



갤러틴은 제퍼슨의 명령으로 기존 재무부 장관이었던 해밀턴의 잘못을 찾는 업무를 시작했다.


최종 보고서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해밀턴은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었고, 단 한 차례의 거짓도 말하지 않았다. 그의 정책 중 잘못된 것은 하나도 없었다’였다.


이후 제퍼슨은 더 이상 과오 찾기를 진행하지 않았다.


연방정부의 재정 건전성 향상


갤러틴은 첫 업무로 위스키 폭동을 가져온 위스키 세금을 철폐했다. 아울러 대부분의 내국세를 모두 없앴고 연방정부 세금도 축소했다. 다만 수입관세는 유지했다. 가장 중요한 세원이었다.



제퍼슨 대통령  <출처 : 위키피디아>


갤러틴의 장점 중 하나는 재정 건전성을 위한 직언이었다.


제퍼슨 대통령과 의견이 다를 경우, 바로 의견을 제시했고 관철시켰다. 제퍼슨은 대부분 수용했다.


덕분에 현실적인 경제 정책이 유지되었고, 세수 수입이 유지되면서 예산을 줄여 나갔다.


 당시 영국과 프랑스의 전쟁은 미국으로서 호재였다.


중립을 표방함으로써 양 국에 물건을 팔 수 있었고, 전쟁으로 인한 유럽의 농업 인구감소로 미국 농산물 수출은 늘어났다.


아울러 수입 물품도 덩달아 늘어나면서 관세 수입도 증가했다.


다만 해군 예산의 지속적 감소로 미국 내 해군의 군사력은 형편없이 낮았다. 이런 상황에서 '제1차 바르바리 전쟁'에서 미 해군이 승리한 것은 사실상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1차 바르바리 전쟁  <출처 : 위키피디아>


그만큼 해군 군함 건조나 군사비 지출은 지속적으로 감소되었다. 반대로 연방정부 부채는 나날이 줄어들고 있었다. 전년 대비 부채 총액이 46퍼센트나 줄어든 해도 있었다.


루이지애나 매입과 자금 문제의 해결


하지만 1803년 급격히 늘어나게 됐다.


루이지애나 매입(Louisiana Purchase) 건이 발생된 것이다.


(‘루이지애나 매입' 내용은 기 작성된 내용을 참고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이 사건은 엄청난 행운이었다.


기회가 오면 반드시 놓치지 않고 적극 이용하는, 미국 고유의 특성이 발휘된 것이다.


갤러틴은 매입 자금 1500만 달러를 마련하는 업무를 맡았다. 연방정부 1년 세수입보다 40퍼센트나 더 많은 돈이었다.



1804년 호프앤코(Hope & Co) 발행 주식  <출처 :  위키피디아>


갤러틴은 유럽의 인맥을 통해 베어링 브라더스사(Francis Baring)와 접촉, 암스테르담의 호프앤코(Hope & Co.) 사와 협약하여 무사히 자금을 조달했다.


국민에 대한 세금 증가 없이 진행하였다. 깔끔하고 사고 없이 처리했다.


자신의 인맥 활용과 탁월한 업무 능력이 돋보인 사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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