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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정엽 Aug 20. 2020

'제조업에 관한 보고서'와  '제1 미국은행'의 종료

앨버트 갤러틴 6

1810년 갤러틴은 의회에 보고서를 제출했다.


갤러틴의 '제조업에 관한 보고서'


제목은 ‘제조업에 관한 보고서(Report on the Subject of Manufactures)’였다. 미국 내 제조업자들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이것은 1791년에 제출된 해밀턴에 제안한 방식과 달랐다. 해밀턴은 보조금을 지급하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으나, 갤러틴은 대출을 시행하는 방식이었다.



알렉산더 해밀턴의 '제조업에 관한 보고서'  <출처 : 위키피디아>


보고서에는 해밀턴이 제출한 용어들을 대부분 사용했다. 특히 이민자들을 위한 경제적 기회들을 제공하고 독점과 규제를 없애는 것에 주력하였다.


그는 미국 제조업의 문제점으로, 유동자본의 공급이 부족하다는 점을 들었다. 돈이 없어 발전을 하지 못한다는 의미였다. 그 돈을 연방정부가 보증을 서서 대출해 주는 방식이었다.



미국 산업혁명의 아버지 새뮤얼 슬레이터  <출처 : 위키피디아>



제조업의 현실과 장기 대출의 필요성


당시에도 제조업의 금융 대출이 존재했으나 기간이 짧았다. 보통 1~2 달이었고 3달이 넘어가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그는 기간을 늘려 장기간의 대출로 만들려 했다.


별도의 투자은행을 만들어 200만 달러씩 총 10년에 걸쳐 공급하는 것이었다. 총 2,000만 달러의 예산이 필요했다.


의회에 제출되고 내용이 공개되었을 때, 불 보듯 뻔 한 반발이 생겼다. 의회를 장악하고 있던 농업 중심의 공화파 의원 생각과 달랐기 때문이다.


뉴햄프셔의 제지공장  <출처 : 위키피디아>


정치적인 다툼과 정책 실행의 실패


치열하게 논의되기보다는, 정치적인 다툼으로 시간이 흘러갔다. 이런저런 시간 속에 몇 년 뒤 영국과의 전쟁이 터지면서 흐지부지 종료되고 말았다.


 ‘통상금지법(Non Intercourse Act, 1809)’의 효과로 국내 제조업 발전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에 만족해야 했다.


영국과 프랑스와의 경제적 우위를 논하기에는, 정치적으로 풀어야 할 과제들이 많았다.


이다음 해에 중요한 사건이 발생했다.


그것은 ‘제1 미국은행(First Bank of the United States)’의 기간 만료였다.



제1 미국은행 건물   <출처 : 위키피디아>


'제1 미국은행'의 연장 노력


1791년 생겨난 중앙은행인 '제1 미국은행(First Bank of the United States)'은 제퍼슨과 매디슨 대통령 시절에 많은 질타를 받았다.


공화파의 많은 정치인들은 은행을 싫어했고, 반대했다. 더구나 중앙은행은 더더욱 그러했다.


갤러틴은 외로이 버텨냈다.


중앙은행이 필요한 이유를 쉽게 설명하고, 장점들에 대해 의원들을 붙잡고 설명했다. 특히 전쟁이 발발할 경우, 군비를 마련할 수 있는 핵심적인 기능을 담당할 것이라고 했다. 사실이었다.


그러나 반대하는 이들이 너무 많았다.


결국 1811년 2월 상원에서 동률의 표가 나왔고, 부통령인 조지 클린턴(George Clinton, 1739~1812)캐스팅 보드를 쥐었다.



조지 클린턴   <출처 : 위키피디아>


클린턴은 반대표를 던졌고, 결국 ‘제1 미국은행’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은행의 청산 과정에서 약 700백만 달러가 빠져나갔다. 순식간에 유동성의 위기를 맞았다.


기간 만료와 매각, 주법은행(state banks)의 증가


결국 프랑스계 이민자이자 ‘제1 미국은행’ 최대주주였던 스티븐 지라드(Stephen Girard, 1750~1831)에게 매각됐다.


갤러틴은 실망과 함께 좌절했다.


스티븐 지라드  <출처 : 위키피디아>


전쟁이 터질 경우, 얼마나 큰 어려움이 닥칠지 훤히 알고 있었다. 실제로 군비의 부족으로 1812년 전쟁에서 큰 어려움을 겪었다.


‘제1 미국은행’ 연장을 반대한 의원들 중에는 주 정부의 이익을 대변한 사람도 있었다.


당시 주 정부의 승인을 받아 설립된 주법은행(state banks)은 폭발적으로 늘어난 상태였다. 1791년 3개에서 1811년 88개로 늘어나 있었고,  ‘제1 미국은행’의 종료 이후 1815년 208개, 1816년에는 246개로 늘어났다.


이 주법은행들은 주 정부의 채권을 가지고 있어야 했다. 아울러 주 정부에 납부하는 세금 비율도 높았다.


펜실베이니아 주의 경우 약 50%의 수입이 주법은행에서 나왔다(1801년 ~ 1805년)



1833년에 설립된 인디애나 주법은행 <출처 : 위키피디아>



이러한 주법은행을 관리하는 ‘제1 미국은행’의 영업 종료는 관리감독 기관의 부재를 뜻했다.


경제와 금융의 혼란과 재부무 장관 유임


감독 기관이 사라져 날개를 단 주법은행들은 무리한 은행권(지폐)을 남발하기 시작했다. 경제의 혼란은 더 깊어졌다.


주법은행이 발행한 은행권(지폐)을 구별하기 위한 책자가 별도로 판매되었다. 주 단위로 새로 인쇄해 판매했다. 위조지폐도 크게 늘어났다.


이러한 상황을 지켜본 갤러틴은 자신의 한계를 체감하고 사직 의사를 대통령에게 전달했다. 매디슨 대통령은 국무장관인 로버트 스미스를 해임하고 갤러틴을 설득했다.


스미스는 그 형인 새무얼 스미스(Samuel_Smith, 1752~1839) 상원의원과 함께 사사건건 갤러틴의 의견에 반대한 인물이었다.


새무얼 스미스   <출처 : 위키피디아>


인내심이 강한 갤러틴은 다시 한번 장관직을 수행하기로 했다. 놀라운 자제력이었다.


하지만 다시 한번 위기가 닥쳤다.


'1812년 미국-영국과의 전쟁(War of 1812)'이 발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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