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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정엽 Aug 21. 2020

'1812년 전쟁'과 헨트 조약 체결

앨버트 갤러틴 7

1812년 드디어 영국과의 전쟁이 발발했다. 당시 대통령은 매디슨이었다.


1812년 미국-영국 전쟁의 발발


이 시기 가장 큰 위기는 매디슨 대통령이 전쟁 경험이 부족하다는 사실이었다.


워싱턴과 해밀턴은 독립전쟁의 경험을 통해 군비와 군대의 부족이 얼마나 국가 안보에 중요한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매디슨과 갤러틴은 복무 경험이 없어, 국방비 통제를 통한 예산 절감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영국군 복장  <출처 : 위키피디아>


아울러 정치적 기준에 입각해, 병력 소집에 대한 이상적인 기준(주 방위군이나 민병대 소집 등)만을 세워두고 있었다.


가장 좋은 것은 전쟁을 피하는 것이었다. 실패했다.


경제 성장과 미국의 안일한 전쟁 준비


당시 미국 경제는 영국과 프랑스 양국의 전쟁으로 경제 성장을 이루고 있었다. 해상 운송업을 통해 막대한 이익을 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영국은 영국대로, 프랑스는 프랑스대로 미국에 대한 불만을 노골적으로 표현했다. 미국 상선을 습격, 선박을 나포하고 선원들을 제로 자국의 군인으로 편입시켰다.

 


미국의 전쟁 선언   <출처 : 위키피디아>


특히 영국과의 갈등은 제퍼슨 시대부터 이어져 왔다. 매디슨 대통령 의 외교적 실패(국무장관 스미스의 역할)도 한몫 거들었다.


갈등은 폭발했고 전쟁이 발생했다.


캐나다 침공의 실패와 해군의 승리


전쟁 초기, 미국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영국과 동맹인 인디언을 몰아내고, 캐나다로 들어가 영국 주둔군을 몰아낼 계획이었다.


영국군은 프랑스와의 전쟁으로 이 곳에 주력군을 투입하기 힘들 것이라는 근거 없는 믿음도 있었다. 착각이었다.


퀸스턴 하이츠 전투 (미국의 패배)   <출처 : 위키피디아>



1812년 당시 190여 척의 전함과 250여 척의 프리깃함을 보유한 영국 해군은 바로 미국 지중해 연안을 봉쇄했다. 본격적으로 미국 상선을 나포했다.


미국은 자국의 프리깃함 6척의 개별적인 승전보를 통해 사기를 높이긴 했다. 하지만 대세를 뒤집기에는 불가능했다.


1812년 전쟁 - 해상에서의 전투  <출처 : 위키피디아>


갤러틴은 체사피크-레오파드 사건 이후 전쟁이 발발할 경우를 대비해 군비 계획을 세워두었다. 관세의 세율 증가와 국채의 추가 발행이었다.


연방정부의 수입 감소와 국채 발행의 어려움


하지만 '제1 미국은행'의 종료로 국채 발행은 물 건너갔다. 같은 편인 주 정부도 연방정부 채권 매입을 꺼려했다. 연방 의회는 관세 수입 확대와 내국세 도입을 거부했다.


내부 이기주의가 있었다. 첩첩산중 이었다.


전쟁이 터지자 영국은 미국에 대한 수출을 크게 줄였다. 관세 수입이 급감했다. 영국 해군의 봉쇄로 수출길이 막히면서 물가도 치솟았다.


대서양 해안선 지도  <출처 : 위키피디아>


불행 중 다행으로 영국군과의 암거래 시장이 커졌다. 어느 정도 부족분은 메꿔졌다.


국채 발행을 해도 매각을 하지 못해 쩔쩔매었다.


결국 갤러틴은 자신의 친구인 존 제이컵 애스터(John Jacob Astor, 1763~1848)를 활용했다.


존 제이컵 애스터는 데이비드 패리쉬, 스티븐 지라드와 함께 신디케이트를 만들어 국채 매각에 성공했다. 판매한 금액은 1600만 달러였다.



존 제이컵 애스터   <출처 : 위키피디아>



이 돈으로 전쟁을 치르는데 어느 정도 숨통이 틔였다. 그래도 부족했다.


연방정부의 지폐 발행과 워싱턴 방화


결국 연방정부는 1812년 ~ 15년까지 다섯 차례의 지폐 발행을 통해 약 3700만 달러를 조달했다. 부채를 줄이겠다는 원칙은 무너졌다. 전쟁으로 채무가 급격히 늘어났다.


초기 전투는 미국이 한없이 밀리는 형국이었다.


1814년 8월에는 수도인 워싱턴이 불에 타기도 했다.


북동부 주 일부에서는 연방 탈퇴를 외치는 촌극도 발생했다. 제퍼슨의 수출금지법, 매디슨의 통상금지법으로 4년간 힘겨운 나날을 보낸 북동부에서의 소규모 저항이었다.


플래츠버그 전투 (미국의 승리)  <출처 : 위키피디아>


전쟁은 약 30개월간 진행되었다. 어느 순간 평화 협상에 대한 의견이 오고 갔다.


러시아의 중재 제안과 협상단 자원


마침 러시아의 황제 알렉산더 1세가 중재의 뜻을 밝혀왔다. 미국측 협상단으로 존 퀸시 애덤스(John Quincy Adams, 1767~1848)가 선택됐다. 갤러틴은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러시아로 출발했다.


배로 달이나 걸리는 먼 길이었다.


존 퀸시 애덤스(29살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웃지 못할 일이 발생했다. 의회에서 갤러틴의 특사 임명을 부결시켰다.


결국 재무부 장관 직을 강제로 사임하고 나서야 협상단의 일원으로 등록됐다. 후임 장관으로 조지 캠벨(George W. Campbell, 1769~1848)이 임명되었다.


내부에서도 갤러틴을 싫어하고 시기하는 사람이 많았다.


조지 캠벨   <출처 : 위키피디아>


러시아에 도착한 이들은 알렉산더 1세의 무관심 속에 6개월을 보냈다. 순식간에 러시아의 관심이 식은 것이다.


결국 미국 대표단은 영국으로 출발했다. 도중에 갤러틴은 주요 인맥이었던 알렉산더 베어링으로부터 귀중한 정보를 입수했다.


협상의 시작과 헨트 조약 체결


헨트에서의 회담은 시작됐다.


지연 정책을 구사하는 영국 대표단을 끈질기게 설득했다. 결국 1814년 12월 헨트 조약(Treaty of Ghent)에 양국이 서명했다.


헨트 조약  <출처 : 위키피디아>


이 소식이 미국에 전해지기 전에 1815년 1월 뉴올리언스 전투가 발생됐다. 은 압도적인 대승을 거두었고, 국가적 자존심을 회복했다.


헨트 조약은 미국 측에 유리하게 작성되었다. 지리멸렬했던 협상단을 하나로 이끌었던 갤러틴의 공이 컸다.


확실한 존재감을 보여줬다. 후에 존 퀸시 애덤스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 갤러틴을 외국 공사로 임명했다.


헨트 조약 후 1815년 그는 귀국했다.


27개월 만에 가족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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