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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정엽 Aug 22. 2020

'제2 미국은행' 설립과  말년의 업적

앨버트 갤러틴 8

갤러틴은 귀국 이후에도 할 일이 많이 남아 있었다.


재무부 장관 사임과 '제2 미국은행' 설립


조약 체결 후 재무부 장관으로 복귀하라는 대통령의 명을 정중하게 거절했다. 두 번이나 요청했다. 그래도 사양했다.


그에게는 중요한 숙제가 남아 있었다. 1812 전쟁 중에 뼈저리게 느낀 중앙은행의 부재였다. 다시 중앙은행 설립에 앞장섰고 의원들을 설득했다.


제2 미국은행 건물   <출처 : 위키피디아>


1816년 드디어 중앙은행이 설립되었다. 명칭은 ‘제2 미국은행(Second Bank of the United States)’ 이었고 20년의 면허 기간을 부여받았다.


프랑스 공사의 취임


이후 대통령과 국무부 장관인 제임스 먼로의 강력한 권유로 프랑스 공사로 부임했다. 재무부 장관으로서의 업무는 마무리되고 외교관으로서의 역할이 시작된 것이다.


그는 홀가분한 심정으로 1823년까지 근무했다. 7년의 시간이었다.


1823년 귀국한 그는 1824년 대통령 선거를 지켜봤다.


매디슨 대통령을 이은 제임스 먼로(James Monroe, 1758~1831, 제5대 대통령) 시대가 끝나고 있었다.


헨리 클레이 (1818년)   <출처 : 위키피디아>


후보는 모두 4명이었고 윌리엄 H. 크로퍼드(William Harris Crawford, 1772~1834), 존 퀸시 애덤스(John Quincy Adams, 1767~1848), 헨리 클레이(Henry Clay, 1777~1852), 앤드루 잭슨(Andrew Jackson, 1767~1845)이었다.


선거에서 앤드루 잭슨이 가장 많은 표가 나왔다.


하지만 과반수가 미달하여 하원에서 결정을 해야 하는 규정으로 정리됐다.(1800년도 제퍼슨 당선 때와 유사했다)


1824년 대통령 선거   <출처 : 위키피디아>


존 퀸시 애덤스 대통령 당선과 '부패한 거래'


이변이 나타났다.


헨리 클레이 측이 존 퀸시 애덤스 측에 몰표를 몰아준 것이다. 결과적으로 애덤스가 제6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클레이는 나중에 국무부 장관으로 임명받았다.


다 이긴 선거를 뺏겨버린 잭슨 측 지지자들은 격렬하게 항의했지만 소용없었다.


후에 ‘부패한 거래(Corrupt bargain)’의 하나로 기록되었다. 이 사건은 앤드루 잭슨 측에 의해 4년 내내 정치적 공격 거리를 제공했다.


존 퀸시 애덤스 대통령   <출처 : 위키피디아>


갤러틴은 정치에서 물러나 펜실베이니아에 있는 자신의 집인 프랜드쉽 힐로 돌아갔다.


영국 공사와 국립 뉴욕은행 은행장 취임


이후 1826년 존 퀸시 애덤스 대통령의 제안으로 영국 공사에 임명되었다.


그는 1년 뒤에 돌아왔다. 이후 자신의 집을 처분하고 뉴욕으로 이주했다.


국립 뉴욕 은행   <출처 : 구글 >


1829년 국립 뉴욕은행(National Bank of New York)의 은행장으로 취임하였다. 그는 뉴욕의 성장과 더불어 원로 정치인의 삶을 살았다. 기족들도 심리적, 정서적 안정감을 느꼈다.


1828년 대통령 선거에서 앤드루 잭슨이 압도적인 표로 당선되었다.


갤러틴은 잭슨에게 '제2 미국은행' 기간을 연장해 달라는 요청을 수없이 했다. 하지만 실패했다.


1836년 제2 미국은행은 문을 닫았다. 이후 1914년 연방준비제도가 생기기까지 78년간 중앙은행이 없는 나라가 되었다.


뉴욕대학교 (1850년)   <출처 : 위키피디아>


1831년 그는 뉴욕대학교 설립에 관여했고, 도왔다. 그의 업적 중에 하나가 더 추가되었다.


뉴욕대학교 설립 지원과 '미국 민속학의 아버지'


그가 말년에 가장 신경을 많이 쓴 것은 인디언 풍속에 관한 자료였다.


관련되어 2권의 저서를 발표했다.


1600년도의 북아메리카 인디언 지도  <출처 : 위키피디아>


1826년 ‘미국의 인디언 언어(A Table of Indian Languages of the United States, 1826)와 1836년에 발표한 ’ 북아메리카 인디언 부족 개관(Synopsis of the Indian Tribes of North America, 1836)‘이었다.


1843년에 그는 ‘미국 민속학 협회(American Ethnological Society)‘를 공동 창립하여 초대 회장을 역임하였다.


이로 인해 그를 ‘미국 민속학의 아버지(the father of American ethnology)’라고 부른다.


미국 민속학 관련 이미지  <출처 : 위키피디아>


갤러틴은 1849년 88세의 나이로 뉴욕 자신의 집에서 숨을 거두었다.


갤러틴의 죽음과 시대적 역할


그의 죽음에 많은 언론이 애도를 표했고, 한 시대의 경제와 금융, 외교를 담당하고 실천했던 업적을 소개했다.


 ‘외국인으로 미국에 건너와서 인맥도 없이 홀로 외로이 업무를 수행하며, 제도를 만들고 이끌었고 몸소 실천했던 진정한 미국의 대변인’이라는 평을 받았다.


 

말년의 갤러틴  <출처 : 위키피디아>



그는 뉴욕 트리니티 교회의 묘지에 묻혔다. 해밀턴의 묘지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해밀턴과 더불어 초창기 미국 금융과 경제의 틀을 만들어낸 갤러틴은 다른 눈으로 세상을 바라봤고, 이를 실천한 사람이었다.


(앨버트 갤러틴 관련 글은 《미국 금융의 탄생》, 휴먼앤북스, (토머스 K. 맥크로 지음, 이경식 옮김) 중

<앨버트 갤러틴의 경제 리더십> 부분에서 발췌, 정리한 내용임을 밝혀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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