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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정엽 Aug 23. 2020

스티븐 지라드와  존 제이컵 애스터 이야기

갤러틴 시대의 주요 인물

스티븐 지라드 이야기  


스티븐 지라드(Stephen Girard, 1750~1831)는 프랑스 남서부항구도시 보르도(Bordeaux)에서 선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프랑스 보르도 항구(1759년)   <출처 : 위키피디아>


그는 미국으로 귀화했고, '1812년 미국-영국' 전쟁  재정적으로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은행가이자 박애주의자였다.


그는 8살에 사고로 오른쪽 눈의 시력을 잃었다. 가난해서  교육도 거의 받지 못했다. 1760년 무역 상선의 보조 소년으로 미국 뉴욕에 처음 왔다. 이후 거래를 튼 뉴욕 상인의 도움으로 무역업을 시작했다.



스티븐 지라드   <출처 : 위키피디아>



1776년 필라델피아에 정착하고 식료품과 주류 판매점을 운영했다. 1790년 나이 40살에 소규모 무역선을 운영하면서 점차 산을 늘려 나갔다.


1776년 메리 램(Mary Lum Girard,  1758~1815)과 결혼했으나 부인의 정신 이상증세로 힘든 나날을 보냈다.


딸을 하나 낳았으나 5개월 만에 죽고 말았다. 개인적인 가정사로는, 불행의 연속이었다.



지라드의 무역선  <출처 : 위키피디아>


그는 미국의 중앙은행인 ‘제1 미국은행’의 면허기간이 만료되자, 갤러틴의 제안으로 은행을 인수했다.


인수 후 이름을 ‘지라드 은행(Girard Trust Company에서 Girard Bank로 변경)’으로 바꾸었다.


1812년 전쟁 시에는, 미국 국채 판매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이로 인해 미국은 군비를 마련할 수 있었고 전쟁을 이어 다.



지라드 동상  <출처 : 위키피디아>


당시 연방정부의 신용은 바닥을 헤매고 있었다. 중앙은행이 없어, 외국 투자자들은 망설였다. 미국 북동부 지역의 상인들은 자신들의 반대도 무릅쓰고 시작한 전쟁에 관심이 없었다. 1812년 전쟁을 '매디슨 씨의 전쟁'이라고 조롱했다.


지라드는 자신 개인의 신용으로 어려움을 극복했다. 신디케이트를 조직, 국채 판매에 성공했다.


'제2 미국은행' 설립 때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대주주이자 이사가 되었다.


지라드 은행(Girard_Bank)은 1983년 멜론 은행(Mellon Financial)과 합병하였다.


2003년 시민금융그룹(Citizens Financial Group)에 매각됐다.


시민금융그룹(1920년)   <출처 : 위키피디아>


그는 1831년 12월, 1년 전 발생된 마차 사고의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당시 81세였다.


지라드후손이 없었다. 막대한 재산 대부분을 자선사업에 기부했다.


특히 1793년 필라델피아에서 황열병이 유행했을 때, 도심에 머무르며 자원봉사자를 모집하고 환자를 돌보았다. 1797~98년에도 동일한 행동을 보여주었다. 수많은 가난한 이들을 구제했다. 직접 병자들을 돌보았다.


이들의 병이 다 나았을 때, '진정한 영웅'이라는 호칭을 얻었다.



지라드 칼리지  <출처 : 위키피디아>


더구나 전쟁으로 부모를 잃은 고아의 교육과 복지에 아낌없이 재산을 사용했다. 막대한 부(당시 미국 GAP(국민총생산)의 약 1/150 수준)의 대부분을 기부했다.


1848년 지라드 대학이 설립되었다.



존 제이컵 애스터 이야기


존 제이컵 애스터(John Jacob Astor, 1763~1848)는 1763년 독일 발도르프라는 지역에서 태어났다.


존 제이컵 애스터  <출처 : 위키피디아>


부모는 정육업자였다. 어린 시절 낙농제품을 직접 팔기도 했다. 형을 따라 런던에서 영어를 배웠고, 1784년 3월 미국으로 건너왔다.


독일계 미국인이자 상인이었고, 미국 최초의 억만장자였다(당시 그의 자산 평가액2019년 기준 약 6억 5000만 달러였다)


1785년 사라 토드(Sarah Cox Todd)와 결혼했다. 그녀는 알뜰하고 검소했다. 남편의 사업을 보조하고 지원하였다.



부인 사라 토르  <출처 : 위키피디아>


1780년대 후반 인디언들과 모피 무역을 진행했다. 뉴욕에 상점을 열기도 했다.


그는 오대호 지방과 캐나다로 연결된 모피 무역을 운영하면서 막대한 양의 모피를 유럽에 수출했다. 청나라와의 교역에서도 크게 성공, 일거에 부를 거머쥐었다.


하지만 1807년 제퍼슨의 '수출금지법'으로 사업은 위기를 맞았다.


하지만 재기에 성공, 1808년 4월 미국 모피회사(American Fur Company)를 설립했다. 자회사인 ‘태평양 모피회사(Pacific Fur Company)’까지 연결시켜 막대한 이익을 거두었다.


1890년 모피 상인  <출처 : 위키피디아>


하지만 1812년 전쟁으로 다시 무너졌다. 1816년에는 아편 밀수에 연루되기도 했다.


1817년 미국 의회의 보호무역 법안에 따라 그의 비즈니스는 다시 회생했다.


당시 모피산업은 수익성이 았다. 1830년까지 미국의 모피 무역을 대부분 장악했다. 소규모 회사를 합병하거나 흡수했다.


하지만 정상에서의 시간은 길지 못했다. 점차 모피의 공급이  감소되었다. 수요의 변화(모피 인기의 감소)조짐도 보였다. 시대가 변하고 있었다.


모피 모자 산업  <출처 : 위키피디아>


제이컵은 사전에 변화를 눈치채고 1834년 회사 지분을 대부분 매각했다.


실제로 1840년 이후 모피사업은 사양화의 길로 들어섰고 하나둘씩 사라져 갔다. 사람들의 취향과 패션 유행이 모피에서 실크로 넘어갔다.


그는 매각한 재산을 대부분 뉴욕 맨해튼 섬의 부동산에 투자했다.


도시의 성장이 빨랐다. 뉴욕이 세계에서 위대한 도시 중 하나로 부상할 것이란 믿음이 있었다.


제이컵의 아들 윌리엄 백하우스  <출처 : 위키피디아>


그의 예견은 적중했고, 말 그대로 대박이 났다.


사망 시,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사업에서 은퇴한 뒤, 남은 일생을 문화의 후원자로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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