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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정엽 Aug 24. 2020

1815년 뉴올리언스 전투

갤러틴 시대의 주요 사건

뉴올리언스 전투(Battle of New Orleans)는 1815년 1월 8일부터 26일까지 진행된 전투이다.  


'1812년 전쟁' 중 발생되었으며, 미군의 대승으로 끝이 났다.


뉴올리언스 전투 200주년 기념우표  <출처 : 위키피디아>



전투 전, 헨트 조약으로 사실상 전쟁은 끝이 났으나, 연락이 닿지 못해 진행된 전투였다.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끈 앤드루 잭슨(Andrew Jackson, 1767~1845)은 전쟁영웅으로 떠올랐고, 제7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시대적 배경


워싱턴 함락 이후 영국은 전쟁을 쉽게 끝낼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미국의 완강한 저항과 지지부진한 전투로 더 이상의 진전은 없었다.


영국 내 여론은 빨리 종료되기를 바랐다. 헨트 조약으로 대세는 정리되었으나, 협정에 대한 소식이 미국에 전달되지 못했다. 조약 체결 후 18일 후에 전투가 발생했다.


뉴 올리언스 전투 지역   <출처 : 위키피디아>


당시 영국군은 정규군이었다. 미국은 소수의 정규군과 다양한 민병대(루이지애나, 켄터키, 테네시, 미시시피)의 연합군이었다. 사실상 현역과 예비군의 싸움이었다.


훈련과 장비, 전투 경험에 비춰봐도 너무 격차가 컸다.


'보르뉴 호수 전투'와 영국군의 진격


더구나 1814년 12월 14일, 보르뉴 호수 전투(Battle of Lake Borgne)에서 영국군이 승리하여 사기도 높았다. 이를 통해 뉴올리언스로 진격할 수 있었다.


보르뉴 호수 전투  <출처 : 위키피디아>


12월 23일 아침, 1,800명의 영국군 선봉대가 뉴올리언스 남쪽 14km 떨어진 미시시피 강 동쪽 제방에 도착했다.


이후 선봉 부대를 출전시키지 않았다. 주력 부대가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나중에 치명적인 전략적 실수로 판명 났다.


사실 영국군 상륙지역부터 뉴올리언스까지 미군의 방어벽이 없었기 때문에, 2시간의 진격으로 쉽게 함락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운명의 여신은 미국 편이었다.


앤드루 잭슨 장군  <출처 : 위키피디아>


앤드루 잭슨의 습격과 성공


잭슨은 탈출한 포로로부터 영국군의 동태를 파악하고, 23일 오후, 바로 반격 준비를 했다. 그는 영국군의 야영지를 파악하고 난 뒤, “영국군이 절대로 우리 땅에서 잠자지 못하도록 하겠다"라고 말했다.


군사를 세 부분으로 나누어 북쪽에서 공격했다.


무방비상태의 영국군은 우왕좌왕했고, 약 260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승리를 거둔 잭슨의 대는 바로 퇴각했다. 4마일 떨어진 로드리게스 운하로 철수했다.


12월 23일 전투 지도  <출처 : 위키피디아>


당시 영국군은 잭슨의 민병대를 보고, ‘쓰러질 듯한 군대’라고 폄하했다. 전투의 베테랑인 영국군이 한 방에 쓸어버리겠다고 호언장담을 할 정도로 자신만만했다. 


하지만 미군의 예상 못한 습격에 호되게 당했다. 


영국군의 반격과 실패


일격을 당한 영국군은 바로 보복에 나섰다.


12월 25일 에드워드 파켄햄(Edward Pakenham, 1778~1815)의 주력부대가 도착하자 28일 공격에 나섰다.


하지만 적절한  해군 지원과 미군 대포의 정확한 포격, 소총수의 집중 사격 등으로 영국군의 사상자만 늘어났다. 견디지 못하고 바로 철수했다.


두 번의 패배에 영국군의 자존심이 손상됐다. 이를 갈면서 최후의 공격을 준비했다.


뉴올리언스 전투 삽화   <출처 : 위키피디아>


잭슨은 12월 25일 전투 전에 병사들을 동원해 쉬지 않고 진지를 구축해 놓았다. 아울러 32파운드, 24파운드, 18파운드 대포를 적절히 배치하고 세 곳으로 나누어 방어벽을 완성했다. 그 길이가 약 1,400미터였다.


결전의 날과 미군의 압도적 승리


드디어 최종 결전의 날이 왔다.


1월 8일, 전열을 정비한 영국군은 미군 저격수의 조준 사격을 피하고자 안개가 낀 새벽에 전투를 시작했다.


사실상 총공격이었다. 강에 배를 띄워 인디언들과 합동 작전을 펼쳤다. 미군의 대포를 취할 계획도 세웠다.



1월 8일 전투 지도  <출처 : 위키피디아>



전투가 시작되고 영국군의 대포가 불을 뿜었다. 하지만 세 곳의 주력 부대가 서로 연락이 맞지 않았고, 실수도 발생했다.


오히려 미군의 침착한 포격에 영국군의 대포가 무너졌다. 진격을 외칠 때마다 영국군의 피해만 늘어났다.


대다수의 고위 장교들이 전투 중에 전사했다. 지휘관인 에드워드 파켄햄도 교전 중 전사했다.


에드워드 파켄햄의 전사  <출처 : 위키피디아>


우왕좌왕하는 사이, 미군 소총수들의 조준 사격이 이어졌고, 영국 병사들이 우수수 쓰러졌다.


당시 미군 민병대는 라이플 소총을 가진 병사들이 많았다. 상당히 보기 힘든 케이스였다.


이 총은 기존의 머스킷 총보다 사정거리가 5배나 길었고, 조준 사격 시 명중률도 높았다.


결국 영국군은 막대한 피해만 입은 채 철수했다. 이후 1월 19일 이 지역에서 완전히 떠났다.



뉴올리언스 전투 승전 그림  <출처 : 위키피디아>


뉴올리언스 전투 결과와 영향


이 전투로 미군은 약 330명의 사상자를 냈다. 영국군은 사상자와 포로를 합쳐 약 2,000명 이상의 피해를 입었다. 열악한 전력 차이를 뒤집고 미국이 승리한 것이다.


사실 영국이 뉴올리언스에 집착한 이유는 미국의 남부 해역을 장악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 전투의 패배로 완전히 전의를 상실했다. 협정의 세부 조건은 미국에 유리한 조건으로 정리되었다.


현 뉴올리언스 풍경  <출처 : 위키피디아>


전투를 지휘한 앤드루 잭슨은 일약 전쟁영웅 이상의 명성을 얻게 됐다.


애국심이 치솟았고, '자랑스러운 미국인'이란 명예와 자존감은 하늘을 찔렀다.


무적의 영국군을 이겨 냈다는 자부심이 그동안 쌓인 전쟁의 피로감을 모두 날려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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