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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정엽 Oct 25. 2020

은행전쟁(Bank War) 2

니콜라스 비들 4

잭슨 대통령의 '제2 미국은행(Second Bank of the United States)' 면허 연장 거부권을 받아 든 의회는 강하게 반발했다. 하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정치적인 논쟁과 1832년 대통령 선거


오히려 정치적 쟁점으로 떠올라 대선을 앞둔 상황에서 뜨겁게 달아올랐다. 언론의 부채질도 한몫했다.



'은행전쟁' 묘사 삽화  <출처 : 위키피디아>


결국 '제2 미국은행(Second Bank of the United States)'의 연장 여부는 1832년 대통령 선거 결과에 달려 있었다. 잭슨 대통령이 재선에 실패하면 은행은 살아날 수 있었다.


비들은 상당한 재정적 지원(자금 대출 등)을 '국민공화당(National Republican Party)'측에 제공했다(당시 이런 행태는 정치적 특혜가 아닌, 일반적 관행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선거 공약에 '제2 미국은행'의 생존 여부가 담겨 있을 정도로 상대방에 대한 공격과 방어가 치열했다.


잭슨 대통령은 '서민과 귀족의 싸움'이라는 프레임을 만들었다. 국민공화당의 헨리 클레이(Henry Clay, 1777~1852) 후보는 잭슨을 독재자나 폭군, 왕으로 묘사했다.

 


1832년 대통령 선거   <출처 : 위키피디아>



드디어 투표가 시작되고 결과가 나왔다. 압도적인 차이로 잭슨 대통령이 승리했다. 최종 결과는 286 표 중 219 대 67이었다.(헨리 클레이 47, 기타 20)


잭슨 대통령의 재선과 연방정부 예금 인출


잭슨 대통령은 자신의 승리를 국민의 뜻으로 간주했다.


'제2 미국은행'의 운영 기간이 4년 정도 남아 있었지만, 서둘렀다. 그때까지 한가하게 기다려줄 인물이 아니었다.


곧바로 연방정부 예금을 빼내 주법은행(State Bank, 각 주의 은행법에 근거하여 설립된 은행)으로 옮기도록 지시했다. 1833년 '제2 미국은행'에 예치되어 있는 연방정부 예금이 수십 개의 주법은행으로 이동했다.


이 과정에서 해프닝이 있었다.

 


루이스 맥레인 재무부 장관  <출처 : 위키피디아>


당시 재무부 장관인 루이스 맥레인(Louis McLane, 1786~1857)은 잭슨의 지시에 대해, ‘경제적 재앙’을 초래할 것이라고 반대했다. 그는 곧바로 해임됐다.


다음 재무부 장관으로 윌리엄 드웨인(William J. Duane, 1780~1865, 11대 재무부 장관) 임명됐다.  마찬가지로 잭슨의 명에 대해 반대 의사를 표시했다.


1833년 5월에 취임했고, 9월에 해임당했다. 잭슨 대통령은 4개월 여만에 그마저 내친 것이었다.


결국 로저 토니(Roger B. Taney, 1777~1864 제12대 재무부 장관, 5대 대법원장)가 새로이 임명됐다. 비로소 예금이 주법은행으로 옮겨 갈 수 있었다.


로저 토니  <출처 : 위키피디아>


이 사건으로 2명의 재무부 장관이 경질된 것이다.


애완은행과 유동성(돈)의 증가


이 연방정부 예금을 유치한 주법은행을 흔히 ‘애완은행(Pet banks)'라고 불렀다. 잭슨의 말에 고분고분하게 잘 듣는다는 의미였다.


이러한 '애완은행'은 약 23개이었다. 예상치 못한 막대한 예금을 받은 주법은행들은 곧바로 유동성 파티에 들어갔다.


주법은행은 태생적으로 은행권의 발급으로 이익을 얻는 구조였다. 때문에 연방정부 예금을 바탕으로 막대한 은행권(지폐)을 발행할 수 있었다. 망설임이 없었다. 오랜만에 찾아온 대박의 기회였다.


여기서 발행된 은행권(지폐)은 시중에 풀렸다. 때마침 연방정부의 토지 판매 정책과 맞물려 엄청난 투기 바람을 몰고 왔다.

 


잭슨 대통령 시대의 애완 은행 묘사 삽화  <출처 : 위키피디아>


이 기간 동안 은행의 대출과 어음 발행, 은행권(지폐)의 남발로 투기꾼이 떼돈을 버는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관리 감독해야 할 '제2 미국은행'은 사실상 손을 놓고 있었다.


들고양이 은행(Wildcat Banking) 투자


‘애완 은행(Pet banks)'들은 넘치는 유동성을 다시 재투자했다. 일명 '들고양이 은행(Wildcat Banking, 와일드캣 뱅킹)' 투자였다.


'들고양이 은행(Wildcat Banking)'은 자신들이 발행한 은행권(지폐)을 금으로 태환 하기 어렵게 하기 위해 일부러 시골 구석이나 지방 외진 곳에 설립된 은행을 말한다. 들고양이나 다니는 외진 곳에 세워진 은행이란 뜻이다.


사실상 적정 자본금 이상의 막대한 은행권(지폐)을 남발했다. 당연히 발행된 은행권의 액면 가치로 인정받지 못했고, 유통되는 할인율이 높았다.


이 들고양이 은행에 투자된 돈은  ’ 1837년 공황(Panic of 1837)‘ 때 대부분의 투자금을 날리게 됐다.


주법은행과 들고양이 은행에서 발행한 은행권은 통화량의 증가를 가져왔고, 금융권에 대한 불안감도 비례해서 커져갔다.



1837년 공황   <출처 : 위키피디아>


은행장인 비들이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은 사실상 거의 없었다.


비들의 통화량 감소 정책과 실패


 '제2 미국 은행'의 예금 인출에 대한 보복으로 짧은 기간에 통화량을 감소시켰다. 주법은행에 제공했던 대출을 회수했고, 금리를 인상했다. 신규 대출은 대폭 축소시켰다.


'제2 미국은행'의 이익을 보존하기 위한 정책이었다고 주장했다. 


오히려 화를 불러왔다.


단기간의 금융 위축으로 경제가 하락하면 '제2 미국은행'의 필요성을 다시금 깨닫게 될 것이라는 것이 비들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여론은 반대로 움직였다. 불경기가 진행되자 사람들의 불만은 연방정부로 쏟아졌다.


잭슨은 이러한 비들의 행동이 자신에게 겨누는 도전이라 생각했다. 더더욱 본인의 결심을 굳혔고 '제2 미국은행'에 대한 증오심은 커졌다.

 


니콜라스 비들 흉상  <출처 : 위키피디아>



뉴욕의 상인들이 대통령과의 면담에서 경제 문제 해결을 요구하자,

 "비들에게 가 보시오. 나에게는 돈이 없소. 비들이 모두 다 가지고 있소. 그에게 가서 해결해 달라고 하시오"

라고 말할 정도로 극도의 분노감을 공공연하게 보여 주었다.


여론은 이를 기사화하고 상대방의 주장을 극단적으로 표현하면서 싸움을 부채질했다. 둘 사이의 반감이 커질수록 신문 판매 수량도 증가했다.


잭슨의 전략은 맞아 들었고, 사람들의 인식은 은행의 책임으로 굳어졌다. 결국 비들은 통화량 감소 정책을 중단해야만 했다.


이제 '제2 미국은행'의 기간 종료는 한걸음 한걸음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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