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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정엽 Oct 27. 2020

은행전쟁(Bank War) 3

니콜라스 비들 5

강경한 잭슨 대통령의 입장에 대해 초조해진 비들 은행장은 좌불안석이었다.


비들의 초조함과 궁지에 몰린 휘그당


급격한 유동성 축소에 대한 경제적 책임이 자신에게 몰리자, 더더욱 궁지로 몰렸다. 해결 방법은 보이지 않고 시간은 흘러갔다.


아울러 자신의 편이라 생각했던 정치인들도 하나둘 멀어지기 시작했다. 괜히 대통령의 눈 밖에 나기 싫어서였다.


헨리 클레이 <출처 : 위키피디아>


대선 때 비들과 정치적 편에 섰던 국민공화당의 헨리 클레이(Henry Clay, 1777~1852) 만을 믿고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1834년 의원 선거가 열렸다. 이 선거를 통해 은행 편에 선 의회 의원들이 선출되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운명은 허락하지 않았다.


1834년 상원, 하원 선거


상원 선거에서 잭슨 대통령의 민주당이 26석(기존 20석에서 6석 추가 확보), 휘그당(국민공화당에서 휘그당으로 당명을 바꿈)이 24석(기존 26석에서 2석 감소)을 얻어 민주당이 다수당을 차지했다.



휘그당 캠페인 이미지  <출처 : 위키피디아>



하원 선거에서는 민주당의 다수당 연장이었다. 143석(기존 143석과 동일)을 얻었고, 휘그당은 75석(기존 63석에서 12석 추가)을 얻었다.


결국 사람들의 선택은 민주당의 정책을 지지하는 편으로 돌아섰다.


선거 결과에 충격을 받은 휘그당은 곧바로 정책 변경에 나섰다. '제2 미국은행'과의 정치적 관계도 끊었다. 각자의 길로 가기 시작한 것이다.


휘그당의 정책 변경 후유증


이제 비들에게 남은 우호 세력은 없었다. 


잠시 다니엘 웹스터(Daniel Webster, 1782~1852)가 잭슨 대통령의 약점을 공격하자는 제의가 왔으나, 현실성이 떨어졌다. 속절없이 은행의 면허기간이 종료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니엘 웹스터  <출처 : 위키피디아>



이와 더불어 잭슨 대통령도 '제2 미국은행'에 대한 간섭과 견제를 더 이상 진행하지 않았다. 대신 연방정부의 부채를 축소하는데 집중했다.


1830년대의 경제적 호황


당시 1830년대는 경제적 호황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제2 미국은행'의 유동성 축소에 따른 짧은 기간의 침체는 있었지만, 대세는 경제 성장이었다.


북부에서는 서서히 제조업의 규모가 커지고 있었고 남부의 면화도 수출 증가와 더불어 가격이 올랐다.


유통 체계의 개선이 효과를 보면서 물류비 감소가 진행되었고 생산량의 증가와 더불어 경제 규모가 커졌다. 덩달아 연방정부의 세수입도 증가했다.



앤드루 잭슨 대통령 <출처 : 위키피디아>


잭슨 대통령은 연방정부 예산을 축소해 부채 규모를 줄이는데 앞장섰기 때문에, 대규모 예산이 투입되는 사업(인프라 투자인 도로, 항만 건설 등)이 계속 줄어들었다. 이 영향으로 국채 발행량이 감소했다.


토지 투기의 증가와 1837년 정화유통령 시행


시중의 유동성은 증가했지만, 국채 발행 감소로 돈이 다른 투자처로 흘러들었다. 주 정부 발행 채권과 토지였다. 특히 서부 지역의 토지 투기와 맞물려 엄청난 가격 폭등이 발생했고 하루아침에 벼락부자가 속출했다.


돈 맛을 본 사람들은 다시 토지에 투자했고, 묻지투자에 사람들의 관심은 오직 '한몫 잡아보자'는 심정이었다. 끝없는 돈이 토지 투기에 집중되었다.


이로 인해 담보 대출을 제공한 주법은행은 토지를 담보로 다시 유동성을 늘리는 방법을 사용했다(이를 목격한 잭슨 대통령은 대경실색했고 '1837년 정화유통령(Specie Circular)' 시행을 통해 토지 투기 세력을 잡고자 했다)



1837년 공황  <출처 : 위키피디아>


'정화(正貨)유통령‘과 1837년 금융공황에 대한 내용은 하단을 참조해 주세요



잭슨 대통령의 견제와 압박 속에  '제2 미국은행'의 기간 만료가 되는 1836년이 다가왔다.


1836년 '제2 미국은행' 기간 종료


결국 '은행전쟁'의 결말은 비들의 패배로 기정사실화 됐다. 


'제2 미국은행'은 면허 기간이 종료되었고 미국의 두 번째 중앙은행은 자연스럽게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다만 면허 종료 2주 전, 비들은 펜실베이니아 주정부에 은행 영업 신청서를 제출했다. 


은행 면허를 옮기는 방법을 사용해서 '제2 미국은행'의 형식적인 영업은 이어 나가게 됐다. 이름은 ‘펜실베이니아 미국은행(Bank of United States of Pennsylvania)’이었다.



비들 초상화  <출처 : 위키피디아>


하지만 필라델피아 본점을 제외한 각 지점은 모두 폐쇄됐고, 연방정부 은행으로서 누릴 수 있었던 특권이 모두 사라졌다. 결국 주 정부의 지역 은행 중 하나로 남게 된 것이다.


비들의 투자 실패와 은행 폐쇄, 그리고 죽음


비들은 은행을 되살리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했고, 1839년 까지 은행장으로 재직했다.


하지만 유럽에서 유치한 자금으로 투자한 면화 사업이 '1837년 공황(Panic of 1837)'으로 큰 손해를 보았다. 투자자들의 집단 소송에 휘말리면서(금액이 약 2,500만 달러였다) 죽을 때까지 괴롭힘을 당했다.


아울러 은행에서의 대규모 사기사건이 발각되면서 결국 1841년 4월 은행은 문을 닫았다. 비들은 자기의 사유 재산으로 채권자들에게 보상을 지불해야 했다.

 


안달루시아의 비들 저택   <출처 : 위키피디아>


여러 건의 민사 소송이 진행되던 와중에 1844년 2월, 58세의 나이로 안달루시아 자신의 영지에서 사망했다.


'은행전쟁'의 결말은 '제2 미국은행'의 기간 종료로 막을 내렸다. 


이후 미국 경제는 금융 감독 기관의 부재로 수많은 경제 위기를 경험하게 되며, 그 주기는 평균 20여 년에 한 번씩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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