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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정엽 Mar 19. 2021

석유사업의 성공과 클리블랜드 대학살

존 데이비슨 록펠러 2

석유는 검은 액체이다. 조명에 사용되는 등유를 추출하기 위해서는 정제 작업이 필요했다.


석유의 활용도와 정제소의 역할


석유 이전에 석탄에서 등유를 추출하는 방법도 있었으나, 효율성 대비 비용이 너무 높았다.


그렇다고 비싼 고래 기름을 사용하기에는 서민들의 비용 무담이 너무 컸다.

 


석유 샘플 <출처 : 위키피디아>



결국 석유에서 추출한 등유의 사용량이 계속 증가 가면서 시장의 크기커져 갔다.


연방정부는 남북전쟁 시기에 등유 1갤런당 0.2달러의 세금을 부과했다. 그래수익은 상당했다. 판매 가격이 높았기 때문이다. 


1863년 기준으로 판매 가격은 배럴당 약 13달러였고, 정제 마진은 약 5 ~ 8달러 사이였다.


정제소를 만드는 자본은 적었다. 단지 몇 명의 사람만으로도 운영이 가능할 만큼 규모가 작아도 사업이 가능했다.

 


석유의 보관 및 이동 <출처 : 위키피디아>


석유사업에 매진하는 록펠러


록펠러는 석유사업에 매진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화학자인 새뮤얼 앤드류스(Samuel Andrews, 1836~1904)까지 동업자로 참여시켜 사업을 확장했다.


석유 정제업은 판매되는 양만큼 버리는 양도 많았다.


록펠러는 정제하고 남은 부산물을 별도로 관리, 이를 활용하여 추가 판매하는 사업적 효율성과 꼼꼼함도 보여주었다.


윤활유, 바셀린 및 파라핀 왁스 등 기타 부산물은 물론 도로포장에 사용되는 타르, 가스 공장에서 사용되는 나프타까지 운송해 팔았다.

 


역청과 아스팔트  <출처 : 위키피디아>



심지어는 정유 파이프를 직접 고안해 만들고 설치했다. 기존 정제 비용인 배럴당 2.05달러에서 0.96달러로 원가를 크게 낮추었다.


하지만 동업자인 모리스 클라크는 이러한 모습에 시큰둥했고 록펠러는 동업자의 지분까지 인수하는 과감함을 보여주었다.


그는 클라크의 지분을 경매를 통해 매입했다.


인수가 확정된 날, '오늘이 세상에서 진정으로 시작하는 날'이라고 말할 정도로 기뻐했다.


회사를 ‘록펠러 앤 앤드루스(Rockefeller & Andrews)'로 만든 그는 본격적으로 정유업에 뛰어들었다.

 


록펠러의 동생인 윌리엄 <출처 : 위키피디아>


동생의 합류와 커져가는 사업 규모


이런 그에게 날개를 달아준 것은 동생인 윌리엄 록펠러(William Rockefeller Jr.)였다.


윌리엄은 클리블랜드 내 정유소 사업을 하고 있었는데, 형의 회사와 합병하여 규모를 키우는데 도움을 주었다.


1867년에는 헨리 플래글러(Henry Morrison Flagler, 1830~1913)를 영입해 회사명을 '록펠러-앤드류스-플래글러(Rockefeller, Andrews & Flagler)'로 바꾸었다.


지역 내 대규모 정유소를 운영하기 시작하면서 뉴욕에 지점도 설치했다.



헨리 플래글러 <출처 : 위키피디아>


이때 록펠러의 나이 28살이었다.


그의 사업 방식은 이익이 발생하면 바로 재투자하는 동시에  비용을 철저히 통제했다. 공격적으로 규모를 확대하방식이었다.


이 사업 방식은 경제 규모가 하루가 다르게 커 나가는 미국의 상황과 일치했다. 물 들어올 때 제대로 노를 저은 것이다.


정유소 내 부산물을 판매하는 방식은 그대로 유지했다. 클리블랜드 정유소와 마케팅 자회사도 설립했다. 이 주유소는 미국 내에서 가장 큰 정유소였다.


그의 회사는 미국 내 거대한 정유회사로 점차 부상하고 있었다.


규모가 점점 커지면서, 록펠러는 기존의 파트너 관계를 청산하고 주식회사로의 전환을 모색했다.



스탠더드 오일 창립 시점의 록펠러  <출처 : 위키피디아>



오하이오의 스탠더드 오일 설립과 카르텔


1870년 1월, 파트너들과 함께 '오하이오의 스탠더드 오일'을 만들었는데, 이 회사가 그 유명한 스탠더드 오일(Standard Oil)의 전신이었다. 록펠러의 나이 31살이었고 정유업을 시작한 지 7년째 였다.


그의 놀라운 업무 처리와 사업 효율성을 바탕으로 회사는 수익성 높은 업체로 성장했다. 미국 내에서 가장 큰 석유 및 등유 운송 업체가 되었다.


그는 운송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별도의 카르텔을 만들었다. 철도회사로부터 특별히 할인된 운임을 적용받기 위해서였다.


결국 경쟁업체보다 원가 경쟁력이 커진 것이다.


심지어는 기존 요금의 최대 50%까지 할인을 제공받았다. 철도회사는 줄어든 요금만큼 다른 고객에게 요금을 인상해 부족분을 보충했다.



오하이오주의 스탠더드 오일  <출처 : 위키피디아>


늘어나는 이익과 '클리블랜드의 대학살'


점점 늘어나는 유통 물량으로 회사는 더욱더 높은 할인을 제공받았고 그만큼 원가를 낮출 수 있었다.


사실상 막대한 이익이 발생된 것이다.


회사의 영향력은 점점 커져갔고 경쟁업체를 압도해 나갔다.


당시 폭발적으로 늘어난 업체들로, 정제 정유의 공급은 소비량 대비 3배나 많을 정도로 과포화 상태였다.


록펠러는 이를 해결하고자 마음먹고 조용히 행동에 나섰다.


1872년에 진행된 일명 '클리블랜드의 대학살(The Cleveland Massacre)'은 4개월 만에 클리블랜드 내 26개의 경쟁사 중 22개를 흡수, 합병한 것이다.



1878년 스탠더드 오일의 주식 <출처 : 위키피디아>



경쟁업체를 돈으로 구매해 버린 것이다.


결과적으로 경쟁업체를 매입하여 효율성을 높이고 운송 할인을 통해 고객에게 제공하는 단가를 낮추었다고 선전했다. 하지만 피해를 본 사람은 분명히 있었다.


워낙 비밀 거래를 좋아했던 그이기에 올바르지 못한 방식으로 인수한 사례도 많았다.



<<스탠더드 오일의 역사>>  <출처 : 위키피디아>


타벨의 <<스탠더드 오일의 역사>> 발표


이러한 내용은 1904년 언론인인 아이다 미네르바 타벨(Ida Minerva Tarbell, 1857~ 1944)이 발표한 <<스탠더드 오일의 역사>>라는 책에서 폭로되었다.


이 책은 1902년부터 19차례에 걸쳐 록펠러와 스탠더드 오일의 폐해를 '맥클루어 매거진(McClure 's Magazine)'에 연재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여기서 스탠더드 오일의 추악한 거래 방식과 뇌물수수, 담합 등 법을 위반한 행위를 발표했다.



아이다 미네르바 타벨  <출처 : 위키피디아>



재계와 미국인들에게 자수성가의 대명사로 존경을 받던 록펠러는 한 권의 책으로 이미지가 추락했다.


타벨의 이 저서는 20세기 탐사 보도에서 역작으로 뽑힐 만큼 인정을 받았다.


뉴욕 타임스가 선정한 미국 20세기 저널리즘 중 상위 100개의 보도에서 5위로 선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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