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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정엽 Mar 17. 2021

세기의 석유왕 록펠러의 탄생

존 데이비슨 록펠러 1

세기의 석유황제였던 록펠러(John Davison Rockefeller, Sr., 1839~1937)는 1839년 뉴욕 주 리치 포드에서 태어났다.


록펠러가 태어난 집  <출처 : 위키피디아>


록펠러의 생애와 업적


그는 스탠더드 오일(Standard Oil Company)의 설립자이자 석유 산업의 거물이었고, 자선가이었다.


시카고 대학, 록펠러 대학, 센트럴 필리핀 대학과 록펠러 재단 (Rockefeller Foundation)을 만든 사람이기도 하다.


독일계 미국인인 그는 카네기와 더불어 미국 경제 역사상 가장 부유한 인물로 손꼽히는 사람이다.


그가 세운 스탠더드 오일은 미국 전체 석유사업의 90%를 차지할 정도로 막강했고, 저렴한 가격의 공급으로 석유 연관 사업의 붐을 일으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스탠더드 오일 회사의 증권 <출처 : 위키피디아>


록펠러의 아버지와 어머니


그의 아버지 윌리엄 에이버리 록펠러는 사기성이 농후한 사람이었고, 세일즈를 하면서 약을 파는 행상꾼이었다. 자주 집을 비웠고 장사를 목적으로 오랜 기간 떠돌이 생활을 하기도 했다.


특히 부인 몰래 가정부와 바람을 피워 자식을 2명이나 갖기도 했다.


록펠러의 어머니는 주부이자 독실한 침례교인으로 사실상 가정을 이끌어간 주인이었다.


그녀는 남편의 방탕한 생활을 참아냈고, 굉장히 검소했다. 자식들에게도 이를 철저하게 교육시켰다.



록펠러의 아버지   <출처 : 위키피디아>


어린 시절의 록펠러


록펠러는 어머니의 행동을 많이 따랐고 이를 바탕으로 성장했다.


어린 나이임에도 집안일과 이웃 일을 도우며 용돈을 버는 한편 꼼꼼히 장부를 만드는 것을 습관화했다. 이것은 평생 동안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의 나이 14세에 가족은 오하이오 주 스트롱스빌로 이사했다.


그가 다닌 학교는 클리블랜드 최초의 고등학교인 센트럴 고등학교였고, 폴섬 비즈니스 칼리지(Folsom's Commercial College, 현 첸슬러 대학교)에서 10주 동안 회계 부기를 배웠다.



첸슬러 대학교 로고 <출처 : 위키피디아>



록펠러의 성격과 젊은 시절


당시 사람들의 '아버지가 자주 집을 비웠음에도 매우 신중하고 진지한 성격'이라고 록펠러를 평가했다.


때로는 엄숙하며 체계적인 업무 스타일에 토론을 즐겼고, 자신의 의사를 명확하게 전달하는 편이라고 말했다.


그의 인상에서 살펴보듯, 쉽게 흥분을 하지 않고 상당히 분석적이며 냉정한 스타일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남북전쟁이 일어나지 몇 년 전인 1855년 9월, 소규모 농산물 거래회사인 '휴잇 앤 터틀(Hewitt & Tuttle)'이란 곳에서 경리 업무를 맡게 되었다.



18살의 록펠러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그는 이 곳에서 장사의 운영 방식과 노하우를 배울 수 있게 되었다. 판매되는 농산물의 가격이 운송 조건에 따라 변동 폭이 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경영 방식의 빠른 습득과 동업


결국 대량 화물로 가격을 낮출 수 있게 된 것을 파악한 그는 몇 가지 개선 방식을 적용했다. 생각 이상의 이익을 가져왔다. 특히 암산을 잘했다. 숫자 계산이 빠르고 정확했다.


하지만 이러한 그의 노력에 회사는 적절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았다. 1858년 자신의 연봉 인상 조건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회사를 나와 독립했다.  


모리스 클라크  <출처 : 위키피디아>



그는 동업자인 모리스 클라크(Maurice B. Clark, 1827~1901)와 함께 ‘클라크 앤 록펠러(Clark & Rockefeller)’라는 농산물 도매사업을 시작했다.


부족했던 자본금을 만들기 위해 많은 대출을 받았다.


대규모 재투자를 통한 사업의 성장


당시 그의 사업 방식은 이익이 발생하면 대출금을 갚기보다는 사업에 재투자하여 규모를 더 키웠다. 늘어난 규모만큼 여기서 발생되는 막대한 이익으로 대출을 상환하는 방식을 선호했다.


젊은 시절에 규모의 경제 방식을 깨우친 것이다.


사업은 생각 이상으로 진행되었고 남북전쟁이 발발하면서 북군에 보급품을 공급했다.


록펠러는 남북전쟁 당시, 입대를 하지 않고 돈으로 대리인을 고용해 군 복무를 대신했다. 이유는 돈을 벌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이 많았다는 것이었다.



남북전쟁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이 와중에 새로운 사업 기회를 포착하게 되는데, 그것은 석유였다.


석유 사업의 시작


당시 클리블랜드 인근의 타이터스빌에서 유전이 발견되었고, 이는 석유사업의 시작을 알렸다. 수많은 이들이 몰려들면서 관련 사업들이 급속히 늘어났다.


펜실베이니아에서 대규모 유전이 발굴되었다. 이 곳에서 1880년대까지 대규모 원유가 공급되었다.


남들은 석유 발굴에 노력할 때 록펠러는 석유 정제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다. 이윤이 발생하는 부가가치가 더 컸기 때문이다.


1862년 유전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1862년 석유 가격이 배럴당 0.35달러에서 13.75달러까지 급상승했다.


너도나도 시추 라인을 만들었고 수천 명이 뛰어들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자, 공급 과잉으로 가격이 폭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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