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전쟁 채권⑥ 전쟁 채권의 판매 매뉴얼을 만들다

2. 서민들의 자본주의가 시작되었다.

by 한정엽

제이 쿡의 성공 소식은 당연히 재무부 장관의 귀에 들어갔고, 호기심이 발동한 체이서 장관은 그를 직접 만났다.


체이서 장관과의 만남과 북부의 채권 계약


면담 이후 쿡의 능력과 애국심을 알아본 체이스는 의회가 승인한 5억 달러의 전쟁 채권 판매를 그에게 부탁했고 쿡은 바로 계약을 맺었다.


남북전쟁 당시 재무부 장관인 체이서 <출처 : 위키피디아>


그는 애국심 보다도 넓은 시장에서 자신의 명성을 휘날리고, 많은 이익을 챙기고 싶은 개인적 욕망이 강했다. 체이서 장관도 그의 욕심을 눈치챘지만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그에게 모든 것을 맡겼다.


5억 달러의 전쟁 채권은 재무부가 직접 판매를 시도했으나 실패한 전력이 있어 능력 있는 중개인을 선정해야 했고 경험 많은 제이 쿡이 그 적임자였다.


1857년 불황과 자금 조달의 어려움


당시 연방정부의 재정상태는 극도로 악화되어 있었다. 전쟁으로 남부의 면화를 매입하여 가공 후 수출하는 방식이 중단되었고 '1857년 불황(Panic of 1857)'의 여파로 관세 수입이 크게 줄어들어 든 것이 직격탄이었다.


금화와 은화 수입이 줄어들자 자금 사정이 말이 아니었다. 심지어 의회 의원들에게 줄 급여조차 부족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 정도로 힘들었다.


이런 위기 속에 하루빨리 자금을 마련해야만 했고, 누구든지 돈을 가져오는 사람을 우선시했던 것이다.



1857년 불황의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사실 재무부로부터 위탁받은 전쟁 채권 5억 달러는 말 그대로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다.


전쟁터의 상황은 하루하루 치열해져 갔고 요구되는 전쟁 비용도 나날이 커져 갔기에 하루빨리 채권을 팔아야 그 돈으로 전투를 진행하고 병사들 급여를 줄 수 있었다.


제이 쿡의 자신감과 5억 달러의 채권 판매


제이 쿡은 팔아야 할 채권이 많다는 것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았다. 성공만 하면 초대박 사업이었던 것이다.


그는 채권을 판매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도입했다.


가장 먼저 채권의 이름을 알기 쉽게 ‘5-20’으로 붙였는데 채권의 표면금리 6%에 만기가 20년이지만, 연방정부의 재정이 좋아질 경우 5년부터 조기 상환이 가능하다는 의미였다.


5-20 전쟁 채권의 판매 기사 <출처 : 위키피디아>



판매 방식은 과거 텍사스공화국 채권을 판매했던 방식을 적용하여 큰 금액의 채권을 사람들이 매입 부담을 느끼지 않도록 소액 규모(50달러, 100달러 등)로 잘게 쪼개었다.


누구나 부담 없는 금액으로 살 수 있게 했고 월마다 분할 납부도 가능했다. 아울러 대도시 중심의 지역적 한계를 넘어서고자 영업지역을 확장시켰다.


다양한 판매 방식과 언론을 통한 홍보


전국 규모의 판매 대리인(약 2,500개)을 모집했고, 이들에게 판매 홍보 자료와 안내 방법을 전달했다.


'국가의 미래를 보장할 수 있고 진정한 애국의 척도'라는 문구를 사용하여 대고객 홍보와 판매를 시작했고 대상도 전문 은행가나 돈 많은 부자를 뛰어넘어 개인을 상대로 소매 판매를 시행했다.


대도시에서는 주법 은행이나 여유 돈이 많은 고액 투자자에게 집중했는데 지역사회에서 영향력을 가진 이들의 입소문도 큰 도움이 되었다.



6%를 제공한다는 전쟁 채권 기사 <출처 : 위키피디아>


금융지식이 전혀 없는 서민에게 판매하는 것이 가장 어려웠지만 해결 방법으로 질문과 답변 방식의 대화 식 홍보 책자를 제공하여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만들었다.


‘채권 투자는 횡재의 지름길’이라는 자극적인 문구도 사용했고 신문사에 광고를 실어주고 홍보비도 주는 조건으로 기사를 작성, 채권 구입자의 미담이나 성공기 등을 게재하는 등 언론을 적극 활용했다.


동시다발적인 판매 방식과 꼼꼼한 홍보 및 다양한 마케팅으로 단기간에 여론 형성에 성공했다. 채권 구매 동기를 효과적으로 부여했고, 곧바로 판매 달성에 기여했다.


남북전쟁의 전환점이 된 게티즈버그 전투. 이후 북군의 승리가 예견되었다 <출처 :위키피디아>


밀려드는 주문과 폭발적인 자금 유입


편지와 우편 주문을 통해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주문으로 지역별 판매 창구가 마비될 지경이었다. 재무부 조폐창은 폭발적으로 늘어난 주문량을 맞추느라 인쇄 기계가 쉴 틈 없이 돌아가 고장 날 정도였다.


말 그대로 대박이 났고 연방정부 채권 붐이 불면서 수요는 더욱더 늘어났다.


미국의 역사학자인 존 스틸 고든(John Steele Gordon)에 따르면, 남북전쟁 직전 미국의 채권 투자 인구는 1퍼센트도 되지 않았지만 제이 쿡의 소액 채권 판매 성공으로 5퍼센트의 인구로 늘어났다고 했다(전쟁 말기에는 채권 매입 속도가 연방정부의 전쟁 비용 지출 속도를 능가했다)



존 스틸 고든 <출처 : 위키피디아>



단 하루에 5,000명 이상의 사람들이 500만 달러를 매입하기도 했다. 결국 짧은 기간에 목표 금액인 5억 달러를 초과하여 1,100만 달러어치가 더 팔렸다.


북부의 승리 기여와 남부의 전비 부족


그의 판매 전략이 효과를 본 것은, '채권 구입은 애국을 하는 동시에 경제적인 이익도 얻을 수 있다'는 점을 공공연히 전파했던 영향이 컸다.


돈도 벌고 애국도 할 수 있다는 심리가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진 것이다.


채권 판매로 막대한 돈이 쏟아져 들어왔고 이는 군수품 구입으로 지출되어 전쟁터의 군인들에게 지급되었다. 북군은 장비의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막강해졌고 해군력은 남부 연합을 월등히 압도했다.


북군의 해군 전투함에 탑재된 대포 <출처 : 위키피디아>



남부 해안가를 북부 해군이 장악하면서 남부의 면화 수출이 중단되는 사태가 벌어지면서 수출 길이 막힌 남부의 면화는 곳곳에서 썩어갔다.


이는 남부 연합의 전비 부족을 앞당기는 결과를 가져왔다.

keyword
이전 06화전쟁 채권⑤천재적인 채권 장사꾼, 제이 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