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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정엽 Jul 10. 2021

기축통화③ 브레턴우즈 체제와 미국 달러의 승리

1. 브레튼우즈 체제의 시작

유럽에서의 전쟁이 한창 진행 중인 1944년 7월, 미국 뉴햄프셔 주에 위치한 브레턴우즈(Bretton Woods)라는 스키 휴양지에 전 세계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브레턴우즈 회의의 배경


이들은 전쟁 후에 진행될 새로운 국제 무역과 금융 체제를 만들기 위해 모인 것이다.



영국의 케인스와 미국의 화이트  <출처 : 위키피디아>


이곳에서 먼저 주도권을 쥔 것은 영국 대표인 케인스였다.


그는 영국도 아니고 미국도 아닌, 새로운 국제 통화를 만들자는 제안을 했고 이름은 방코르(Bancor)라 불렀다. 지금의 가상화폐 개념처럼 사전에 발행 한도를 정해놓고 이를 글로벌 기축통화로 만들어 사용하자고 했다.


변동성이 거의 없는 고정환율로 설정했고 이를 각국의 화폐와 연동시키자는 제안이었다. 사실상 금본위제를 대체하는 새로운 통화체계를 주장한 것이다.


달러를 기축통화로 지정합니다


이와는 달리 미국 대표인 해리 화이트는 달러를 새로운 기축통화로 제안했다.


 미국의 달러 <출처 : 위키피디아>


새로이 패권국가가 된 미국은 전 세계의 금 보유량 중 70%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금과 연계가 가능한 달러만이 새로운 기축통화의 자격이 있다는 뜻을 내비쳤다.


다른 참여 국가들은 이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입장에 서 있었다. 사실 이 회의는 미국의 안을 처음부터 밀어붙여도 별다른 문제가 없을 정도로 화이트의 위력이 강했다.


물론 미국의 대표라는 타이틀이 이를 뒷받침했지만, 타 국가의 대표들은 미국의 눈치를 봐야 하는 입장이었고 전쟁 후 미국과의 관계도 원활하게 유지하고 싶어 했다.



브레턴우즈 회의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그만큼 미국의 위상이 높았다.


하지만 상대방이 그 유명한 영국의 경제학자 케인스인 만큼 미국으로서는 최대한 존중을 해 주고 있었다. 그렇다고 케인스의 마음이 편했던 것은 아니다.


자신의 입장이나 주장이 사실상 받아들여지지 않은 과정을 지켜본 케인스도 적지 않은 스트레스를 받았는데, 이 영향 때문인지 협정 체결 후 2년 뒤인 1946년 과거의 심장병이 도져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당시 나이 62세였다.


브레턴우즈 체체의 시작


여러 의견 속에 브레턴우즈 체제에서 결정된 가장 중요한 내용은 국제 기축통화가 미국의 달러로 결정되었다는 것이었다.


브레턴우즈 회의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다만 금본위제의 영향으로  35달러 당 금 1온스로 교환이 가능하다는 전제 조건이 달려 있었다.


이것을 보장한 이유는, 양차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유럽 국가들이 미국의 전쟁 물자를 금으로 구입했기에 전 세계 금의 70%가 미국에 있었다.


언제든 달러와 금의 교환이 가능하다는 미국의 호언장담이 깔려 있었다.


아울러 금 보유량 내에서 발행하는 달러는 단순 종이가 아닌, 안정적인 통화라는 무언의 의미이기도 했다. 이에 따라 각국의 통화는 금과의 연계가 아닌, 달러를 연계시키는 것으로 정리됐다.


이제 무역 거래는 달러 중심으로


즉 각 나라의 화폐는 무역을 통해 달러를 벌어들이거나 자국의 통화를 달러로 환전한 뒤, 이 달러를 미국에 제시하면 금으로 교환이 가능한 방식이었다.



금환본위제의 시대를 연 달러와 금  <출처 : 위키피디아>


이 제도는 금본위제가 아닌 '달러-금환본위제(gold-dollar standard system)'라고 불렸다. 나라는 달러를 통해 금과의 교환이 가능해졌다.


이제 명실공히 모든 나라가 금을 얻기 위해서는 달러를 구입해야 했고, 이는 자국의 주요 수출 국가가 미국이 되어야 함을 의미했다.


일방적이고 강제적인 느낌을 버릴 수 없었지만, 국제 경제 질서가 잡혀간다는 사실에 많은 나라들이 안도감을 느꼈다.


그만큼 미국은 강대국의 위치에 올라서 있었다. 전쟁을 겪으면서 발생된 불안한 금융 체계를 하루빨리 정리해 안정적인 통화제도를 유지하고 싶어 했다.


안도하는 수출 국가들


사실상 앞전에 발생된 1차 세계대전 후에 기축통화 국가였던 영국이 경제적 주도권을 상실하게 되면서 많은 국가들이 자국의 화폐가치 하락에 무방비 상태였다.


환율이 춤을 추면서 상대 국가의 통화 가치를 믿지 못하는 불상사가 벌어졌고 이는 국제 무역 질서의 혼란을 가져왔다.


당연히 자국만을 생각하는 보호무역이 성행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군의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과거에는 이런 혼란스러운 문제에 영국이 개입하여 통제하고 조정했던 것을, 이제는 완전히 힘을 잃어버린 파운드의 모습을 지켜보게 된 것이다.


결국 영국을 대신하여 모든 자본의 중심을 금과 연계된 달러 하나로 묶어두면, 국제 통화 질서가 자연스레 성립된다는 것이 미국의 설득 논리였다.


이렇게 되면 각 나라의 정치인들은 자국 내 통화의 안정성을 믿고 장기적인 계획을 수립할 수 있을 것이란 미래상도 보여 주었다.


달러의 전성시대가 왔다


아울러 수출 경쟁 국가가 통화 가치를 하락시켜 국제 금융 질서를 혼란시키는 불안 요소도 사전에 막을 수 있는 장점도 있다고 주장했다.



기축 통화의 역사 <출처 : Republic Monetary Exchange>


결국 무역의 중심 국가가 자연스레 미국으로 집중되면서 영국으로부터 진정한 패권을 넘겨받았다.


1944년을 기점으로, 미국의 달러가 공식적으로 기축통화(world currency)로 인정을 받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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