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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정엽 Sep 27. 2021

자유와 생존을 위한 흑인대이동 1

미국의 노예 제도 15

'그거 알아? 북동부의 도시에서 일하는 내 사촌이 알려줬는데, 거기서는 우리가 농장에서 뼈 빠지게 일하는 것보다 3배나 많은 돈을 받고 공장에서 일하고 있대.


그래도 사람이 부족해서 계속 뽑고 있다고 하는데? 우리도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여기 남부에서 사는 게 너무 무서워. 백인들의 린치도 두렵고...'


이 말은 1916년 경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 남부 흑인 가정에서 나온 가상의 대화이다.



 남부에서의 생활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남부 흑인의 불안감과 북부 경제의 성장


북동부의 도시에서 노농자로 일하는 흑인의 수입이 남부의 흑인 가족이 농촌의 일꾼으로 버는 돈보다 훨씬 더 다는 말과 함께 이들이 처한 현실적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북부와 동부, 서부 도시의 급격한 성장은 남부의 흑인들을 자극했고, 백인들의 집단 린치와 폭행, 인종갈등에 힘들어하는 이들이 남부를 떠나게 된 원동력이 되었다.


결국 1916년부터 1970년까지 남부의 흑인들이 북부와 동부, 서부로 이동을 하기 시작했다.


이를 '흑인대이동(Great Migration)'이라고 부른다.



흑인대이동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제1차 흑인대이동


이 사건으로 1900년대 부터 대이동이 끝난 시점인  1970년 대에는 남부의 흑인 비율이 93%에서 50% 까지 낮아졌다.


1916년부터 1940년 까지를 '제1차 대이동'이라 하고 약 160만 명의 흑인이 이동했다.


이동의 주요 원인은 흑인 대상의 런치와 남부 경제의 몰락, 인종차별의 심화 등이 직접적 이유였다.


이들의 운송 수단은 도시와 도시를 이어주는 기차가 주요 이동 방법이었지만, 직접 마차를 몰거나 배를 타고 이동하기도 했다.


가장 큰 문제는 새로운 곳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두려움과 이주비용이었다.



1920년 이동하는 가족의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낯선 환경의 적응과 생존


아울러 흑인에 대한 경멸과 멸시가 남아있던 시기라, 이동한 후에도 정착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1929년에 발생된 대공황 시기에는 일시적으로 이동이 중단되기도 했다. 그래도 정착한 사람들은 도시에서 악착같이 생존해 나갔고 이들만의 고유 집단 지역을 만들어 나갔다.


흑인 빈민가를 지칭하는 대명사로 사용되는 '할렘(Harlem)'은 뉴욕 시 센트럴파크 북쪽 116번가에서 155번가에 걸쳐있는 지역으로 맨해튼 북부에 위치한 미국 최대 흑인 거주지역이다.



1920년대 뉴욕 할렘의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1차 대이동 시기에 거주하여 자연스레 발생된 지역 이름이었다.


제2차 흑인대이동


이후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군수공장의 폭발적 성장이 진행되었고, 공장 노동자의 인력이 부족해지면서 1940년부터 1970년까지는 500만 명의 남부 흑인들이 이주했다. 


이를 '2차 대이동'이라고 부른다.


경제 구조의 발달로 수많은 인력을 필요로 했고, 많은 남부 흑인을 흡수하는데 무리가 없었다.


사실상 남부 농업에 종사한 흑인들이 생명의 위협에서 벗어나 자유와 부를 찾아 도시의 노동자로 이전한 것이다.



1920년대 포드자동차에서 교육받는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이들은 철강, 자동차, 조선 및 육류 포장 산업 등에서 자신의 노동을 제공했다. 


육체적 노동으로 생계를 이아가는 사람이 1910년 약 50만 명에서 1920년에 90만 명으로 그 수가 거의 2배 정도 증가했다.


지위 향상과 소득의 증가


기존 백인 중심이았던 노동조합도 이들의 위치를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단순 노동직에서 숙련된 작업과 감독관으로 진급을 하기 시작했다.


특히 1940년대에서 1960년대 사이에 단순 노동직의 인력은 4분의 1로 줄어든 반면, 화이트 칼라 작업 군에 속하는 관리직과 행정직의 직업군으로 이동한 수는 2배가 넘었다.



7개 주에서 이주로 인해 늘어난 흑인 인구 수를 보여주는 그래프  <출처 : 위키피디아>



이들의 소득이 크게 증가하면서 빠르게 빈곤율을 벗어날 수 있었는데, 평균 소득 이하에서 생활하는 흑인 가족의 비율이 1940년 87%에서 1960년 47%, 1970년 30%로 감소되었다.


컬럼비아 대학교 저널리즘 대학원의 명예 학장인 니콜라스 레만(Nicholas Berthelot Lemann) 교수는 흑인 대이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흑인대이동(Great Migration)은 역사상 가장 크고 가장 빠른 대중의 내부 이동 중 하나였다.


아마도 처형이나 기아의 즉각적인 위협으로 인한 것이 아닌 가장 큰 규모였을 것이다.



1차 흑인대이동 시 변화된 인구 분포 <출처 : 위키피디아>



이동한 인원의 숫자 측면에서 이탈리아, 아일랜드, 유대인 또는 폴란드 인과 같은 다른 인종 그룹의 미국 이민보다 순위가 높다.


흑인들에게 이주란 미국 내에서 자신이 살던 경제적, 사회적 기반이었던 곳을 떠나 새로운 곳을 찾는 것을 의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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