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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정엽 Oct 09. 2021

사이러스 매코믹의 밀 수확기

기술과 산업의 발달 3

초창기 미국의 핵심 사업은 농업이었다.


아직 제조업의 성장이 본격화되지 않은 시대에 농업의 중요성은 두말할 필요도 없지만, 생산성은 굉장히 낮았다.


미국의 밀 농장  <출처 : 위키피디아>  


노동력 중심의 농업 생산성


사실상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더디게 진행되었는데, 가장 중요한 자원이 사람의 노동력이었다. 종사자의 수에 따라 수확의 기준을 삼을 정도였다.


말이 끄는 기계적 수확기를 이용해 광대한 토지의 수확물을 거두고 이를 정리, 사업화하는데 집중했다.


사실상 농업의 경쟁력은 누가 더 많은 일꾼을 동원하고 말을 얼마나 많이 소유하고 있느냐가 핵심이었다.



매코믹의 고향인 셰넌도어 밸리의 농장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자칫 잘못하면 애써 기른 농작물이 수확 시기를 놓쳐 상하게 되거나, 썩어서 내다 버려야 할 정도로 짧은 시간에 많은 사람을 집중적으로 투입해야 했다.


한정된 인력으로는, 대규모의 토지가 있어도 수확할 수 있는 양이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사이러스 매코믹의 도전


이를 효과적으로 개선하고자 노력한 사람 중에 대표주자인 이가 사이러스 매코믹(Cyrus Hall McCormick)이었다.



사이러스 매코믹 <출처 : 위키피디아>



그는 버지니아 주 셰넌도어 출신으로, 아버지의 농장에서 밀 수확에 대해 많은 고민과 생각을 했다. 그는 28년간 아버지의 농장에서 일을 한 경험이 있었다.


수없이 많은 밀을 수확 지만, 고생한 만큼 힘만 들뿐 수확량이 증가하거나 소득이 늘어날 것이라는 개선의 여지가 보이지 않았다.


당시 밀 농사의 가장 중요한 걸림돌은 생산 방식이었다.


 다 익은 밀은 짧은 기간 내 수확해야 했고, 한 명이 최대 수확할 수 있는 범위는 약 4,000제곱미터였다(그의 아버지 농장은 일꾼 1,300명이 동시에 투입되어야 하루에 수확이 가능했다)


아무리 밀 농사가 잘 되고 양이 많아도 수확할 수 있는 사람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었다.


기존 수확기의 개선과 특허 승인 성공


결국 묘책을 찾기로 하고 노예였던 조 앤더슨(Jo Anderson)의 도움을 받아 기존에 사용되는 수확기를 개선해 보았다.

 


수확기 모델의 스케치 <출처 : 위키피디아>



당시 스코틀랜드 출신의 패트릭 벨이 만든 설계도에 기반하여 여러 기계를 참고, 새로운 방식으로 설계를 하여 획기적으로 개선한 수확기를 만들었다.


여러 시행착오를 거쳐 1834년 6월, 특허 승인에 성공했다.


하지만 미국의 넓은 영토를 하나의 표준화된 기계로 적용하는 것은 애당초 무리가 있었다. 농부들의 신뢰도 얻지 못해 기계는 거의 팔리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1837년 경제 공황 때 동업자가 손을 털고 나가버리자 자금줄이 막힌 그는 파산 직전까지 몰렸다. 가족들이 모두 달라붙어 기계의 성능도 개선시키고 적극적으로 밀을 수확하는 시범도 보였지만 농부들은 전혀 믿지 않았다.


유사 제품도 범람하면서 판매 수요는 요지부동이었다.



자동수확기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1840년에 1대를 팔았다. 1841년에는 아예 판매가 없었다. 마침내 끈질긴 홍보 노력으로 1844년에 70대를 판매할 수 있었고 그다음 해에 개선된 성능을 가진 수확기로 두 번째 특허를 받을 수 있었다.


영국의 옥수수법 폐지와 늘어나는 주문


이때 시대적 사건이 발생했다.


1845년 영국이 수입 식품과 농수산물에 과다한 관세를 적용한 옥수수법(곡물법)을 폐지하자, 저렴한 미국산 밀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매코믹은 1847년 운송에 유리한 지역인 시카고에 공장을 세우고 대량 생산을 준비하면서 영업과 마케팅을 중점적으로 키워나갔다.


회사 이름은 매코믹 수확기 제조회사(McCormick Harvesting Machine Company)였다.



매코믹 회사에서 1908년부터 1913년까지 제조된 Type A 트랙터 <출처 : 위키피디아>



농장에서 기계 작동을 시연한 뒤, 생산성이 폭증해 농장주의 이익이 크게 늘어난다는 점을 적극 홍보했다. 입소문을 타고 판매망이 늘어난다.


중요한 시기(수확기)나 필요한 경우 판매지역 내에서 신속하게 부품을 제공하고 기계를 수리하기 위해 잘 훈련된 기술자를 파견해 운영했다.


1851년 영국 런던에서 열린 ‘만국 산업제품 박람회’에 자동 수확기를 출품해 상도 받았다.



 만국 산업제품 박람회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사업 성공과 밀 수확의 확대


이후 1856년부터 매년 4000 개 이상의 수확기를 생산했으며 대부분 중서부와 서부에서 판매되었다. 남북전쟁 시기에는 시카고에서 가장 높은 수익을 올린 회사로 이름을 알렸다.


당시 시카고의 밀 (소맥) 교역량이 1861년에 3,000만 부셸 (bushel)에서 1863년에 6,500만 부셸로 크게 늘어났는데, 배경에는 그의 자동 수확기가 었다.


매코믹의 수확기는 북군의 남북전쟁 승리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말년의 매코믹 초상 <출처 : 위키피디아>



남군이 노예의 노동력에 의존하는 동안, 북군은 농업의 기계화를 통해 적은 인원으로 곡물의 생산량을 증가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영국은 북부의 밀수입이 줄어들까 염려하여 대놓고 남부의 편을 들지 못했다. 남부의 면화보다는 북부의 밀을 더 소중히 여긴 것이다.


북군의 국방부 장관인 에드윈 스탠튼(Edwin Stanton)은 ‘매코믹 수확기가 없었다면 북군은 이길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에드윈 스탠튼 <출처 : 위키피디아>


촤대 곡물 생산국이 된 미국


남북전쟁 중에도 농업의 기계화는 지속해서 확대되었고 수확량은 증대되었다.


많은 양의 곡물을 유럽에 수출하기 시작했고 남북전쟁이 끝난 뒤, 1876년 미국은 세계 최대의 곡물 생산국이 되었다.

 

하나의 기계가 미국의 농업생산력을 바꿔 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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