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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정엽 Oct 11. 2021

표준화 및 호환성으로 성공한 콜트의 리볼버

기술과 산업의 발달 4

미국의 역사는 독립전쟁의 발발로부터 시작했다.


전쟁 무기의 효율성


전쟁의 승리로 나라가 탄생했듯이, 국가 운영에 있어 군대는 당연히 필요하다는 의식이 강했다. 전쟁 무기의 효율성에 따라 승패가 갈릴 수 있다는 교훈도 얻었다.

 


1776년 롱아일랜드 전투의 식민지군 <출처 : 위키피디아>



이 영향일까? 무기에 대한 미국의 인식은 다른 나라와 많이 다르다. 아울러 군인을 대하는 모습도 단순한 존경심 이상이다.


미국 경제의 발전에 있어 가장 많은 영향을 준 것은 표준화와 호환성이다. 경영 사전에 나오는 이런 단어에 대해 가장 최적화된 조직이 바로 군대다.


표준화와 호환성의 중요성


전쟁과 전투에 사용되는 무기는 호환성을 가장 중요시 여긴다. 다양하고 잡다한 총기에 서로 총알이 맞지 않는다면, 그 부대는 당연히 패하게 된다.

 


제1차 세계대전 때 사용된 독일의 다양한 권총과 소총 <출처 : 위키피디아>



어느 부대에서나 부품 수리나 교환이 가능한 제품을 우선시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목화에서 씨를 쉽게 분리할 수 있는 조면기를 만들어 남부 면화 사업을 새로이 정의한 휘트니도 무기 제작에 뛰어들어 크게 한몫 챙긴 사람이지만, 돈을 벌기 위해 총기 생산에만 노력했지 표준화나 자동화를 위해 공을 들이지 않았다.


실질적인 표준화와 호환 시스템을 만든 사람은 총기 제작자인 사무엘 콜트(Samuel Colt)이다.



사무엘 콜트 <출처 : 위키피디아>


사무엘 콜트의 리볼버 아이디어


콜트는 1814년 미국 코네티컷 주 하트퍼드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 대륙 군 출신인 외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았고 11살 때부터 백과사전을 통해 화약에 관해 깊은 관심을 보였다. 


이런 경험은 평생 그가 총기 생산에 주력하게 된 동기가 되었다.


15살 때부터 아버지의 섬유공장에서 일을 시작한 그는 증기선 ‘Corvo’를 타고 항해하던 중 우연히 배의 원형 '회전' 실린더를 보고 사업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이에 더해 클러치를 사용하여 회전하거나 배를 고정시킬 수 있는 선박의 스티어링 휠을 유심히 관찰하고 스케치했다. 이 한 장의 그림이 미래에 미군이 참전하는 전투의 승패를 바꾸었다.


1858 리볼버에서 제거된 오른쪽 중앙의 실린더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그의 머릿속에서 탄생되어 스케치된 것은 재장전 없이 여러 번 발사가 가능한 총이었다.


구체적으로 구상하여 만들어진 총이 바로 '리볼버 (Revolver)' 권총이다.


세계 최초의 자동권총을 디자인하고 구상해 낸 것이다. 하지만 초기 시험에 수많은 실패가 뒤따랐다.


화약을 구성하는 성분의 부족과 혼합 비율 실패 등으로 잦은 폭발이 발생된 것은 물론 회전이 되지 않은 고장도 발생했다.

 


초창기 콜트의 싱글 액션 아미 <출처 : 위키피디아>



자금 부족으로 북부 지역을 돌며 웃음 가스를 팔아 돈을 모으기도 했다. 결국 존 피어슨(John Pearson)이라는 총기 제작사를 고용, 드디어 회전 실린더를 이용한 총을 설계하는 데 성공했다.


사업의 어려움과 뜻밖의 기회, 그리고 성공


영국에서 먼저 특허를 받은 콜트는 바로 미국에서 ‘콜트 패터슨(Colt Paterson)’이라는 회전식 소총의 특허도 승인받았다.


이후 대박을 노리며 본격적인 사업을 시작했지만 엄청난 마케팅에도 시장의 반응은 냉담했고 결국 버티다 못해 1843년 문을 닫았다.


하지만 극적 반전이 일어났다.


1846년 미국-멕시코 전쟁이 발발하면서 텍사스 레인저스(Texas Ranger Division)의 사무엘 워커(Samuel Hamilton Walker)라는 대위가 콜트에게 1,000 개의 리볼버를 주문한 것이다.



사무엘 워커의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이전에 콜트의 리볼버 성능을 몸소 체험한 그는, 전쟁이 발생된 시기공을 세우고자 성능이 우수한 리볼버를 대량으로 주문한 것이다.


그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고, 교전 현장에서 재장전 없이 여러 번 발사가 가능한 리볼버는 '승리'라는 이름을 가져왔다.


이를 계기로 입소문을 탄 콜트의 리볼버 사업은 살아났고 대출을 받아 총기공장을 크게 세웠다.


전쟁에서 성능을 인정받은 리볼버는 넘치는 주문 행진을 이어갔고 콜트에게 엄청난 돈다발을 안겨주었다.



1857년 콜트의 무기공장 <출처 : 위키피디아>


서부 시대를 대표하는 아이콘


리볼버는 서부시대의 대표적인 단어가 되었고 재장전 없이 6발을 사격할 수 있는 효율성은 단발 장전에 치중했던 다른 나라와의 총기 경쟁에서 ‘전투의 승리’라는 고유명사처럼 불렸다.


참고로 현재 우리나라 경찰이 사용하는 총기도 바로 6 연발 리볼버이다. 


콜트는 자신의 공장을 군대와 같은 규율로 관리했고 상호 교환이 가능한 부품을 사용하여 조립 라인을 단순화시켰다.

 


다양한 리볼버 <출처 : 위키피디아>



아울러 자동화 시스템에 적합한 특수 기계를 사용, 총신을 절단하거나 깎는 데 사용하여 사람의 노동력을 최소화하는데 주력했다.


한 마디로 대량 생산이 가능하게 만든 것이다.


대량 생산과 표준화의 도입


작업 과정 중 기계 공정이 80%를 차지했고, 최종 부품 조립이나 검수 등의 20% 공정만 사람이 담당했다.


결국 부속품 호환이 서로 가능하고 규격화된 제조 공정은 대량의 리볼버가 생산된 동력이었다.


과거에 비해 성능이 향상된 총기가 훨씬 더 저렴한 가격으로 시장에 나오자 수요는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사무엘 콜트 추모탑 <출처 : 위키피디아>



콜트의 사업은 대성공을 거두었고 그가 도입한 표준화와 호환성의 시스템 방식은 이후 자동차 왕 포드의 사업에도 적용되는 사례를 남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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