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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정엽 Nov 26. 2021

1929년 월스트리트의 대폭락

1929년 미국의 대공황 01

1929년 9월, 미국의 다우존스 지수는 381.17포인트에 근접할 만큼 사상 최고가에 근접해 있었다. 하지만 행복은 여기까지 였다.


1929년 월스트리트의 대폭락 사건


한 달 뒤인 10월 24일, 검은 목요일(Black Thursday)부터 주가는 폭락하기 시작했다. 일명 '월스트리트의 대폭락(Wall Street Crash of 1929)'이었다.


이후 등락을 거듭한 주가는 1932년 7월 가장 낮은 41.88포인트까지 추락했다. 고점 대비 3년 동안 90% 가까이 폭락한 것이다.



1929년 ~ 32년 주가 하락 그래프  <출처 : 위키피디아>



주가 지수가 최고점을 맞이했을 때, 늘어난 부를 움켜쥐고 환호하던 사람들은 이후 3년 동안 죽음과도 같은 고통의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이러한 끔찍한 일이 어떻게 발생했을까?


그 원인은 지금도 명확하게 밝혀지고 있지 않다.


경제학자의 다양한 해석과 원인에 대한 내용들이 쏟아졌지만, 아직도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1920년대 미국의 번영


다만 분명한 것은 1929년은 주식을 비롯해 투자 하기 가장 좋은 시절이었다는 사실이다. 말 그대로 번영의 시대였고. 미국의 시대였다.



광란의 1920년대 뉴욕을 중심으로 한 영화 '위대한 개츠비' <출처 : 위키피디아>



1929년 3월에 취임한 제31대 대통령 허버트 후버의 당시 선거 문구는 "모든 식탁에는 닭고기를, 모든 차고에는 자동차를!(A chicken in every pot, a car in every garage!)"이라고 외칠 정도였다.


19세기 이전에 미국이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부와 물질의 축복을 받은 시대였다.


더구나 새로이 탄생한 미국의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eral Reserve System)'는 과거 불행의 원인으로 지목된 경제공황을 모두 해결해 줄 수호신이라는 믿음이 굳게 자리 잡고 있었다.


금융계의 수호천사인 연준(Fed)은 불안한 투자 환경을 든든하게 지켜줄 완벽한 시스템으로 인식되었고, 이러한 낙관론은 주식시장에 풍부한 유동성과 심리적 안정감을 안겨 주었다.


새로운 경제적 전환점


신용평가회사인 무디스를 세운 존 무디(John Moody)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했기에 호황이 다가온 것'이라고 할 정도로 낙관적인 분위기였다.



당대의 경제학자인 어빙 피셔 <출처 : 위키피디아>



예일대 교수이자 근대 경제 이론의 개척자인 어빙 피셔(Irving Fisher)는 "주식 가격은 영원히 높은 고원에 있는 듯 하늘에 닿았다"라고 말했다.


이렇게 환호를 보내고 열광적인 지지를 보냈던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앞으로 닥칠 불행을 알지 못했던 것일까?


사실 당시의 분위기로는 이렇게 까지 단번에 주식 시장이 폭락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진 이는 아무도 없었다.


주가 대폭락의 영향


단순히 너무 과열된 시장이 기술적 조정을 받은 것이라는 의견과 너무도 많은 차입을 갖고 주식시장에 몰려든 투기꾼으로 인해 버티지 못하고 일시적으로 무너졌다는 인식이 강했다.


하지만 그 여파는 생각 이상으로 길었다. 3년이라는 시간 동안 장기간 지속되었다.


역사에서는 1929년 9월에 발생된 주식 대폭락 사건을 '1929년 월스트리트 대폭락(Wall Street Crash of 1929)'이라고 불렀다.



1929년 월스트리트 대폭락 <출처 : 위키피디아>



문제는 주식 시장의 붕괴를 시작으로 경제 환경이 같이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주가 하락과 연동된 경제 침체


가뜩이나 농산물의 과잉생산으로 힘겹고 어려웠던 농촌 경제는 결정적인 치명타를 맞았고, 주가 폭락으로 자금 경색이 발생된 회사들은 직원을 해고하기 시작하면서 실업률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철강의 생산량이 줄어들었고 건설경기도 추락하면서 자동차의 판매도 주춤거렸다.


더구나 신용 경제라는 미명 하에 수많은 대출과 이제 막 도입된 할부 소비에 맛을 들인 노동자들이 돈을 갚지 못해 직격탄을 맞았다. 갚을 돈은 많은데 벌이가 줄어들면서 소비가 위축되었다.


기업들은 그래도 생산량을 줄이지 않고 엄청난 물건을 쏟아내면서 가격이 폭락하는 디플레이션 현상이 발생했다. 물건값이 너무도 저렴했지만 이를 살 돈이 없었다.


사실 더 큰 문제는 은행들이 무너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은행의 파산과 금융 혼란


생활이 어려운 이들은 은행으로 몰려가 예금을 찾았고, 가뜩이나 유동성이 부족한 상황에서 내어줄 돈이 없는 은행들이 하나둘 파산하기 시작했다(1929~32년은 최소한의 저축액을 보장해주는 예금자 보호법이 없었다)



아메리카 유니언 은행에 몰려든 시민들 <출처 : 위키피디아>



은행의 파산 소식은 금쪽같은 내 돈이 모두 허공으로 날아갈 수 있다는 위기감을 불러왔고 더욱더 많은 이들이 은행으로 몰려갔다. 일명 뱅크런(bank run)이었다.


은행의 위기는 실물 경제에 바로 영향을 끼쳤다. 시중에 돈이 씨가 마르면서 생활에 필요한 물건을 구입할 돈 조차 구경하기 힘든 세상이 돼 버린 것이다.


이런 경우, 금리를 낮추고 막대한 유동성(돈)을 공급하여 경제가 원활히 작동할 수 있게 해야 하는데, 연준(Fed)은 망설인 채 이를 실행하지 않았다.  


청산주의를 통한 자유방임주의


아니, 오히려 당시의 분위기는 ‘청산주의(liquidationism)’라 하여 경쟁력 없는 기업은 도태되고 살아날 기업은 더 크게 성장할 것이라는 낙관적인 사고방식이 자리 잡고 있었다.


가만히 놔두면 경제는 스스로 자생의 힘으로 다시 회복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대공황 당시 청산주의 선봉에 선 앤드루 멜런 재무부 장관 <출처 : 위키피디아>



정부가 직접 개입한다는 것은 생각하지 못했다.


사실 불황이 이렇게 까지 오래갈 것이라는 생각도 하지 못했지만,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경험 속에 정치권도 우왕좌왕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결국 극심한 소비 침체와 실업률의 증가, 수출의 감소에 따른 세수 수입의 감소까지 겹치며 미국 역사상 가장 힘들고 어려운 시간을 맞이하게 된다.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


이 어려움은 미국 내에서 끝나지 않고 유럽의 국가들에게까지 영향을 끼쳐 결국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게 된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1943년 연합군의 독일 폭격 <출처 : 위키피디아>



이 대공황은 1932년 루스벨트 대통령이 당선되면서부터 서서히 회복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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