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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정엽 Nov 30. 2021

광란의 20년대(Roaring Twenties)

1929년 미국의 대공황 03

유럽으로의 농산물 수출이 감소된 이후 침체에 빠진 농업 지역과 달리, 대도시 지역은 후끈 달아 올라 있었다.


모든 것이 흥분된 상태였다.


제1차 대전의 승리와 경제적 호황


제1차 세계대전의 승리를 밑바탕으로 전 세계에서 미국이 가진 위상이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져 있었다. 전 세계가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광란의 20년대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경제적 상황도 이를 뒷받침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미국의 위치는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유럽 국가를 대상으로 빚을 갚아 나가던 나라에서, 세계 최대의 채권국가로 변신한 것이다.


이를 이끌어 준 것은 대규모로 성장한 제조업의 발전이었다. 독보적인 위치는 물론 전 세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자그마치 42%가 넘을 정도였다.


군수 공장은 전쟁 전의 자동차 공장과 산업 시설로 돌아가면서 막대한 양의 상품을 쏟아냈다.


칙칙한 군수품에 질려서 질 좋은 소비재에 목말라하던 사람들욕구가 폭발하면서 과소비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새로운 금융 강국으로의 인식


가장 안전한 국가라는 인식으로 유럽의 투자금도 밀려들어 왔다.



1920년대 뉴욕의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영국 런던의 위상을 넘어 미국의 뉴욕 월스트리트가 새로운 금융 도시로 인식되었다.


이에 더해 새로운 기술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었다.


산업화의 시작을 알린 철도 산업의 뒤를 이어 자동차 산업이 본격적인 궤도에 들어선 것이다. 관련된 사업이 단순히 자동차 생산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소재로 사용되는 철강, 고무, 유리를 비롯하여 원료로 사용되는 석유 산업, 도로 기간망 구축까지 어디 하나 빠질 것 없이 광범위한 범위까지 넓혀졌다.


자동차 수 증가와 연관된 회사의 호황


곳곳에 세워진 고속도로와 자동차 도로는 미국의 지도를 바꿔놓았고 문화의 영역까지 확장시켰다.


1920년대 부자들의 전유물로 알려진 미국의 자동차 수는 700만 대에서 2,300만대로 대폭 증가했다. 포드의 뒤를 이은 자동차 회사인 제너럴모터스의 주가는 1925〜1928년 사이에 10배 이상 치솟을 정도였다.



포드 자동차 공장의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이런 자동차의 뒤를 이어 산업화에 성공한 전기 산업은 지역 내 발전소가 속속 들어서면서 값싸게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대량 공급에 성공한 전기는 공급가를 크게 낮추었고, 과거의 가스등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밝기를 제공했다.


전기 산업의 발전과 생산성의 증가


이제 밤에도 자유롭게 책을 읽을 수 있게 되었고 야간 시간확대는 늦은 밤에도 공장의 작업이 가능하게 만들어 노동자의 생산성이 올라가는 효과를 가져왔다.


급속한 생활환경의 변화는 좀 더 새롭고 편리함을 추구하는 물건을 갖고 싶은 욕망을 만들어 주었고 때마침 소형 전기모터의 발명은 최적의 생활 도구를 제공해 주었다.


냉장고, 다리미, 세탁기 등 과거 하인들이 주로 담담했던 일들을 가정에서 직접 할 수 있게 되면서 시간의 단축은 물론 가사 노동의 의무에서 벗어나 생활의 여유로움까지 찾을 수 있게 되었다.


이때를 기점으로 주요 인기 직종이었던 ‘하인’이라는 직무가 점차 사라져 갔다.



1920년대 냉장고 광고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남은 시간을 활용하기 위해 사람들이 구입한 것은 '라디오'였다.


라디오의 출현과 폭발적인 성장


라디오는 그야말로 새로운 세상을 만나게 해 준 물건이었다. 유행을 전파하는 최첨단 도구이자 세상의 소식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커뮤니케이션 매개체였다.


기존 신문이 갖고 있던 뉴스의 역할뿐만 아니라 오락, 음악, 정보 등 미처 알지 못했던 새로운 내용들이 이 작은 도구를 통해 쏟아져 나왔다.



진공관 라디오를 듣는 어린이의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라디오는 1922년 6,000만 대가 팔렸다. 6년 뒤인 1928년에는 자그마치 8억 4,300만 대로 판매량이 폭증했다.


라디오 방송의 전파는 RCA(RCA Corporation)라는 회사가 독점하다시피 했는데, 사람들은 이 회사를 그냥 ‘라디오’라고 불렀다.


1919년에 설립된 이 회사는 성장하는 만큼 수익도 증가했다. 1921년 250만 달러에서 대공황이 닥치기 직전인 1928년에는 2,000만 달러로 10배 가까이 증가했다.


주식 시장의 성장과 넘치는 유동성


이 회사의 주가도 기존 1.5달러에서 85.5달러로 폭증하면서 주주들에게 돈벼락을 안겨 주었다.


이런 소식은 월스트리트를 흥분시켰고 더 많은 돈이 주식시장으로 몰리는 현상을 불러왔다.


거래량도 폭발해 1929년 가장 많은 거래량을 보여 줌으로써 일명 '날아다니는 제너럴모터스’라고 불릴 정도였다.



RCA 라디오 광고 모습(1945년)  <출처 : 위키피디아>



라디오를 통해 감미로운 음악이 들리면서, 전국적인 재즈 열풍이 불었고 금주법(The prohibition law)의 영향으로 밀주 거래를 통해 떼돈을 번 마피아들이 거리를 활보하기 시작했다.


찰스 린드버그의 대서양 횡단 성공


찰스 린드버그(Charls Lindbergh)가 1927년 대서양 횡단에 성공했다는 소식은 새로운 스타 탄생을 알렸고, 이제 막 성장하는 항공 산업으로 투자금이 물밀 듯이 몰려들었다.


최초의 비행에 성공한 라이트 형제의 항공사를 비롯, 커티스, 보잉사의 주식이 주식시장에서 인기 종목으로 떠올랐다.



찰스 린드버그 모습  <출처  위키피디아>



오직 돈만 벌면 된다는 한탕주의가 거리에 만연하기 시작했고, 이를 이용한 불법적 사기도 크게 증가했다.


대표적인 사건이 찰스 폰지(Charles Ponzi)가 벌인 사기 행각이었다.


찰스 폰지 사기 사건


이탈리아 이민자 출신인 그는 유럽에서 국제우편 쿠폰을 구매하여 미국에서 판매, 그 환율 차이를 이용해 생긴 이익을 나눠준다는 명분으로 다단계 금융사기를 시작했다.


나중에 투자받은 돈으로 먼저 투자한 사람에게 배당금을 지급하는 방식으로 피라미드형 사기를 벌인 것이다.


비록 1년 만에 탄로가 났지만, 오직 돈이 최고라는 시대의 문화를 보여준 사건이었다.

 


찰스 폰지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부동산도 가만있지 않았다.


겨울이면 찬바람이 매섭게 부는 뉴욕, 시카고 사람들은 따뜻한 플로리다로 여행을 떠났고 이곳의 부동산이 서서히 투기 열풍에 휩싸이게 되었다.


폭발한 플로리다 부동산 시장


소득의 증가와 교통의 편리함은 과거에 비해 이곳의 접근성을 크게 향상해 언제나 수요가 넘칠 것이라는 믿음 하에 땅 사재기에 선 것이다.


특히 해안가 가까운 곳은 연일 가격 폭등이 지속되었다.


일반 토지가 건축용지로 전환되면서 10%의 계약금 만으로도 매매가 가능하게 거래 방법도 간소화시켰다.



플로리다의 부동산 홍보 이미지 <출처 : 위키피디아>



결국 프리미엄을 받고 팔아넘기는 방식(일명 떴다방)이 크게 유행하면서 손바뀜이 자주 일어났다.


부자가 되려는 욕망이 사람들을 더 많이 끌어 모았고, 해안가에서 점점 더 멀어진 지역까지 투기의 어 가격이 상승했다.


8천 달러로 매매된 건이 몇 달 만에 2만 달러를 호가하기도 했고, 해안가에 가까운 토지는 2만 달러가 단기간에 7만 5천 달러로 팔려 나갔다.  


꺼지는 부동산 거품과 손실, 그리고 '광란의 20년대' 모습


하지만 1926년 9월과 10월에 불어닥친 폭풍과 허리케인이 모든 것을 앗아갔다.


플로리다를 강타한 허리케인으로 400명 이상이 사망했고, 13,000여 개의 지붕이 땅바닥으로 내려왔다.


정신이 번쩍 든 사람들은 앞다투어 시장에 매물을 쏟아내기 시작했고 하루아침에 부동산 열기가 확 가라앉아 버렸다.


한창 부동산 열기가 뜨거웠던 1925년 마이애미 은행의 어음 교환액은 약 10억 7천만 달러였는데, 1928년에는 10분의 1인 1억 4천만 달러로 단번에 쪼그라들었다.



1928년 허리케인이 지나간 뒤 <출처 : 위키피디아>



그 많은 돈이 허공으로 사라진 것이다. 하지만 초창기 부동산 전문가들은 이미 눈치를 채고 다 빠져나간 뒤였다.


역사에서는 이 시기를 ‘광란의 20년대(Roaring Twenties, 1920~29)‘라고 부르며 대공황이 발생하기 전까지 아무 걱정 없이 인생을 즐기던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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