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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정엽 Nov 28. 2021

대공황 당시 유럽 국가들의 환경

1929년 미국의 대공황 02

국가의 경제가 호황에서 불황으로 넘어가는 것을 경제위기(economical crisis), 공황(panic)이라고 표현한다.


극심한 경제 침체에 처한 세계


특히 불황의 강도가 깊고 심할 경우, ‘대공황’이라는 표현을 적용하는데, 1929년 대공황(Great Depression)이 이에 적합한 단어였다.



대공황 당시의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자본주의의 위기라 불릴 정도로 심각한 경제적 추락을 경험한 전 세계는 극심한 실업률과 경제 침체로 오직 혼자만 살아가야 한다는 근린궁핍화 정책(이웃나라 죽이기, Beggar thy neighbour)에 대한 시행으로 혼란 속에 빠지게 된다.


결국 제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사이에 미국에서 발생된 대공황으로 전 세계는 어렵고 힘든 나날을 보내게 된다.


그럼 이 대공황의 시작은 미국의 잘못으로 시작된 것이었을까? 왜 1929년 10월부터 시작이 됐을까? 전쟁을 치른 유럽 국가가 아닌, 왜 성장을 하고 있는 미국에서 발생했을까?


사실 수많은 논란과 주장이 있지만, ‘바로 이것이다!’라고 아직까지 딱 부러지게 정의를 내리지 못하고 있다.  


대공황의 전조 현상


하지만 대공황의 전조는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는 시각은 공통적이다.



제1차 세계대전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제1차 대전이 발행하기 전, 유럽의 제왕인 영국을 비롯한 제국주의 체제의 국가들은 자국의 식민지 팽창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이제 막 발생되기 시작한 국제 자본도 이에 동조하고 있었다.


산업혁명의 영향으로 막대하게 쏟아지는 자국의 상품을 팔아야 하는 시장이 필요했다.


오직 영토의 확장이 최선이라는 욕심 생겼다. 이를 위해 상대 국가의 영토를 장악하는 것이 '부의 척도'라고 여겼고 이 과정에서 수많은 전쟁이 발생했다.


하지만 유럽 내 국지전의 성격으로 시작된 '제1차 세계대전'은 너무도 많은 것을 집어삼켰다. 이렇게까지 전쟁이 오래갈 것이라 예상한 나라는 없었고, 엄청나게 많은 자원이 소모될 것이라 생각한 국가도 없었다.


전쟁을 치르면서 상실한 국가의 부


그동안 가지고 있던 대부분의 국가 자산을 전쟁에 털어 넣은 것이다.



제1차 대전 당시 미국과의 차관 협상을 위한 영국-프랑스 금융위원회 멤버 <출처 : 위키피디아>



이 전쟁으로 영국의 군비 지출은 GDP 대비 4%에서 38%로 상승했다. 동원 가능한 모든 자원을 쏟아부었다.


막대한 인원이 군수장비 생산에 투입되어 국가의 자원을 빨아들였고, 부족한 장비의 구입은 지폐의 대량 발행과 외국에서의 차입(미국)으로 해결하였다.


비단 영국뿐만이 아닌 전쟁을 치른 대부분의 국가들 상황은 비슷했다.


배상금을 통한 손실 보존과 독일의 혼란


그렇게 막대한 돈을 투입하여 어렵게 전쟁에서 승리한 연합군은, 패전국인 독일에 대한 가혹한 전쟁 배상금을 통해 자국이 입은 손실을 보존받으려 하였다. 가장 선두에 선 나라가 프랑스였다.



베르사유 조약  <출처 : 위키피디아>



하지만 패전국인 독일의 상황도 이와 마찬가지였다. 가진 것을 모두 쏟아부었지만, 전쟁에 지면서 막대한 빚만 남았다.


1921년 연합국이 배정한 독일의 전쟁배상금 액수는 자그마치 1,320억 마르크였다.


더구나 제1차 세계대전의 패배 후 빌헬름 2세 황제 체제가 무너졌다. ‘11월 혁명’을 통해 생겨난 바이마르 공화국은 통화팽창 정책을 시행했고 이 결과로 과도한 화폐 발행이 진행되었다.


이는 독일 내 극심한 초인플레이션을 불러왔는데, 당시 발행된 지폐 중에 100조 마르크 지폐는 물론 1조 마르크 동전도 발행되었을 정도였다.


결국 경제적 혼란을 통해 나치(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와 히틀러의 등장을 가져오게 된다.



은행에 쌓여있는 마르크 지폐 <출처 : 위키피디아>


베르사유 조약 이후의 혼란


이런 상황에서 독일에게 가혹한 배상금을 물리기로 한 베르사유 조약(1차 대전의 전후 문제 처리를 위한 조약)은 미국과 영국, 프랑스와의 관계도 혼란을 가져오게 되었다.


프랑스는 독일의 배상금과 자국의 부채를 연결시켜 하루빨리 돈을 받기를 원했으나 영국의 케인스는 독일의 급격한 경제 붕괴는 유럽의 모든 국가가 함께 무너질 수 있기 때문에 이 조약의 무리한 시행 압박은 결국 파국으로 갈 것이라는 예언을 했다.


하지만 당장 발등의 불인 자국 경제를 살려야 하는 유럽의 정치권은 이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영국의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 <출처 : 위키피디아>



여기에 불을 붙인 것은 금본위제로의 복귀도 한 몫했다.


영국의 금본위제 복귀와 불경기


전쟁에서 승리한 영국은 자국의 경제 여건을 고려하지 않은 채, 과거의 영광을 되살리기 위해 무리하게 금본위제로의 복귀를 시행했다. 이 해가 1925년이었다.


이는 파운드의 가치를 무리하게 높게 평가해 적용시켰다. 불안한 경제 구조상, 이는 무모한 도박이었다.


금본위제 시행으로 영국 정부의 긴축재정정책이 시행되면서 바로 통화량이 줄어들었다.


국민들이 내야 할 세금이 증가하고 금리가 올라가면서 파운드의 환율이 치솟는 결과를 가져왔다.


결국 외국 상품보다 비싸진 영국 상품은 가격 경쟁력을 급격히 상실하게 되었고 수출량이 대폭 감소했다. 영국 내 공장이 문을 닫고 실업률이 상승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결국 영국은 극심한 불황을 극복하고자 1931년 9월 금본위제를 포기하게 된다.


무리한 금본위제 탈퇴


금의 연계에서 벗어난 파운드는 대량으로 공급되기 시작했고, 시중에 유동성이 공급되면서 경제가 서서히 살아나기 시작했다.



1925년 금본위제 복귀를 시행한 영국의 처칠 재무부 장관(가운데) <출처 : 위키피디아>



영국의 경우와 반대로, 전쟁에 패배한 국가들은 세계 경제가 금본위제로 돌아서자 자국의 화폐 가치가 낮아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는 갚아야 할 전쟁 차관의 규모가 크게 늘어남은 물론 국가의 부채도 증가하는 효과를 가져와 더 큰 경제적 고통을 안게 되었다.


결국 이들 국가들도 하나둘 금본위제에서 탈출하기 시작했고, 자국의 통화를 늘리는 정책을 쓰기 시작했다.  


이러한 유럽 국가들의 경제적 고통은 결국 수출과 자본 유입을 통한 극복만이 최선의 방식임을 알게 해 주었고 이를 위해 적극적인 차관을 시도하게 되었다.


미국의 자본과 금본위제 유지


이를 뒷받침해 주는 것은 미국의 자본이었다.


1920년 대 경제적 호황을 보인 미국은 유럽 국가들의 상황을 이해하고 연준(Fed)을 통해 기준 금리를 낮춰 미국의 자본이 유럽에 투자될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었다.


당시 연방준비제도를 이끌어가는 사람은 뉴욕 연방은행장이었던 벤저민 스트롱(Benjamin Strong, Jr.)이었다.


그는 미국과 유럽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미국의 금리가 유럽 국가들의 금리보다 낮추는 정책을 시행. 미국 자본이 자연스럽게 유럽에 투자될 수 있도록 유도했다.  



초대 뉴욕 연준 은행장인 벤저민 스트롱 <출처 : 위키피디아>



당시 미국의 상황은 경제 양극화가 극심했다.  


경제의 양극화와 넘치는 유동성


전쟁이 끝나고 유럽의 농업이 살아나면서 미국의 농산물 수입이 감소되면서 농산물 가격이 폭락했다. 이로 인해 미국의 농부들은 힘겨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이와 반대로 전쟁 중에 탄력이 붙은 공업 생산력은 최절정에 달아 있어 막대한 양의 자동차가 생산되었고 새로운 신기술(라디오의 출현 등)과 항공 산업의 시작 등으로 엄청난 자본이 뉴욕 월스트리트를 감싸고 있었다.


풍부하다 못해 넘치는 유동성은 시장에 과도한 거품을 안겨 주고 있었고, 이러한 모습은 점재적인 투기의 위험성을 안고 있었다.



포드자동차의 모델 T  생산 라인 <출처 : 위키피디아>


이런 위험성은 미국 내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유럽 국가들이 빌려온 자금은 대부분 단기 차입이 높았다. 언제든 투자된 자본이 미국으로 돌아가게 되면, 취약해진 금융과 경제력이 급격히 무너질 수 있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서서히 금리를 올리는 미국


특히 미국이 금리를 올리게 되면, 자본이 미국으로 돌아갈 것은 자명했다.


유럽의 국가들은 미국의 재할인율이 인상되지 않도록 무언의 협조를 계속 요청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미국이 언제까지 인내해 줄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자국의 주식 시장의 열기가 너무도 뜨거워 이를 잠재워야 할 필요성이 발생된 것이다.


그것은 1928년 2월, 연준이 금리를 인상하게 되면서 비로소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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