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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정엽 Dec 02. 2021

할부 거래의 유행과 마진론의 성장

1929년 미국의 대공황 04

 ‘광란의 20년대’ 끝자락에 위치한 1929년에 경제학자들의 미래에 대한 낙관적인 평가가 쏟아졌다.


낙관적인 여론과 불타는 주가 지수


주식 시장에 대한 찬사가 줄을 이은 것이다.


당대를 대표하는 경제학자이자 예일대 교수인 어빙 피셔는 “주가는 앞으로도 고공 행진할 것 같은 지점에 이르렀다.”라고 외칠 정도였다.


한 마디로 자신감이 가득 찬 예언이었다.



어빙 피셔 교수(오른쪽)  <출처 : 위키피디아>



극히 보수적이라 자부하는 '하버드 경제학회'도 이에 동조해 경기 예측에 대한 긍정적인 의견을 내놓았다.


아울러 유럽의 중앙은행들과 연결된 국제 자본의 협조로 미국의 르네상스 시대를 열렸다고 자평할 정도로 자신만만해했다.


실제로 상황도 아주 좋았다.


1920년대 미국 자본주의의 최정점


당시 대통령인 캘빈 쿨리지(John Calvin Coolidge, Jr.)는 기업이 하고자 하는 일에 간섭을 하면 안 된다는 논리를 갖고 있었고 철저한 자유방임주의 정책을 시행했다.


그는 “미국의 주요 사업은 비즈니스 그 자체다(The Business of America is Business)”라고 할 정도였다.



캘빈 쿨리지 대통령 공식 초상화 <출처 : 위키피디아>



재무부 장관인 앤드류 멜런(Andrew W. Mellon)은 부유한 은행가 출신이었고 그 역시 이에 적극 동의했다.


하지만 틈이 벌어진 빈부격차는 점점 더 커져만 갔다. 늘어나는 기업의 이익만큼 노동자의 수입도 비례하여 증가하지 못했다.


오히려 생산성을 올리는 방법이 연구되어 이들의 노동력을 뽑아냈지만 충분한 보상이 이루어 지지 않았다.


할부 거래의 유행과 마진론의 확대


결국 이런 상황에 등장한 할부 거래는 폭발적인 성장을 가져왔다. 가지고 싶은 물건은 오늘 바로 사용하고 돈은 나중에 갚아도 되는 현상이 자연스레 퍼지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상 미래의 소득을 저당 잡힌 것이다.


생활에 사용되는 제품의 편리함에 비하면, 할부 이자는 그리 큰 부담이 되지 않았다.



당시 할부 구입의 무서움을 표현한 그림  <출처 : 위키피디아>



이런 위험성에 대해 무감각해져서일까? 투자에도 비슷한 성향이 나타내기 시작했다.


일명 주식시장의 '마진론(margin lending, 주식 등을 담보로 하여 자금을 빌려 주식을 더 사들이는 방법)‘이 유행했다.


레버리지(leverage) 거래라 불린 이 방법은 본인이 가지고 있는 주식을 담보로 추가 대출을 받아 더 많은 주식을 매입하는 방식이었다.


주가가 올라 매각을 하면 본인이 가진 자본보다 큰 이익을 얻게 되지만, 주가가 떨어지는 경우에는 부담해야 할 이자로 인해 담보로 잡힌 주식이 강제 매각되어 손실폭이 어마어마하게 발생하는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하지만 주가가 더 오른다면? 그리고 주가 상승의 분위기가 계속 이어지다면? 가만히 앉아서 떼돈을 벌 수 있는 구조였다.



1920년대와 1930년대 미국의 신용 분석. 그래프의 길이가 신용대출의 크기다 <출처 : 위키피디아>



1927년 마진론의 규모가 대폭 증가했는데, 연초 8억 달러 규모에서 36억 달러로 급증한 것이다.


주가 지수의 폭발적 상승


이 돈은 주식시장에 흡수되었고, 다우존스 지수를 끌어올리는데 일등 공신이 되었다.


당시 주식시장의 분위기는 일명 ‘묻지마 투자(AOT : Any Old Thing, 어떤 것이라도 상관없다)’ 분위기였다. 이러한 차입한 돈을 이용한 투자는 개인뿐만 아니라 기관 투자자들도 앞다투어 진행했다.


새로운 기술이 생겨나고 기멉들이 크게 성장하는 시기라, 주가가 올라간다는 적절한 명분도 이를 뒷받침했다.


하나의 유행처럼 고착화되어 버렸고, 오히려 돈을 빌리지 못하면 바보 취급을 받을 정도였다.


 상황을 감독해야 할 연방준비제도는 오히려 부채질할 정도로 손을 놓고 있었다.



돈을 빌리러 은행으로 몰려가는 사람들 <출처 : 위키피디아>



제1차 대전 후 유럽 재건을 도와야 한다는 명분으로 1925년에 금리를 인하, 주식 시장의 활황에 도움을 주었다.


유럽 재건 명분을 위한 연준(Fed)의 금리 인하


1927년에는 영국 중앙은행인 영란은행의 금 유출을 막기 위해 이를 지원하는 성격으로 금리를 3.5% 까지 낮추었다.


하지만 부작용으로 발생했다.


미국 내에는 낮은 금리로 인해 주식 시장에 막대한 투기 자금이 몰리는 것은 물론 대기업이 가지고 있던 유휴자금마저 주식 시장에 직접 대출을 해 주는 것으로 확대되었다.


특히 기업 공개나 유상증자를 통해 들어온 자금은 이를 산업에 재투자하지 않고, 자금시장에 15%의 이율로 대출을 시행했다.


당시 배당금 규모가 약 4% 였기에 이 차익만큼 기업의 이자수익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한마디로 땅 짚고 헤엄치기였다. 대표적인 회사가 록펠러의 스탠더드 오일(Standard Oil)이었다.



막대한 자금을 운용한 록펠러의 스탠더드 오일 <출처 : 위키피디아>



기업에서 대출을 받은 투자가들은 다시 주식을 사들이고, 이 영향으로 주가는 다시 오르는 현상이 반복되었다. ‘악순환의 연속’이었다.


기업의 자금 대출과 레버리지 투자의 증가


주식 시장의 수입에 만족하지 못한 금융사들은 헐값에 사들인 이머징마켓(emerging markets, 신흥시장)의 위험성 높은 채권(투기 등급)까지 고가에 판매를 시작했고, 여기서 벌어들인 수익은 다시금 부를 늘리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여기에 가장 앞장선 이가 현재 시티은행의 전신인 내셔널시티(National City) 은행장인 찰스 미첼(Charles E. Mitchell)이었다.



찰스 미첼  <출처 : 위키피디아>



미첼은 주식 투자는 채권 투자만큼이나 안전하다고 역설했다.


그는 대공황이 발생된 전날까지도 ‘주식 시장은 안전하여 모든 악재는 이미 주가에 반영되어 있어 마진론을 통한 수익은 더욱더 늘어날 것’이라고 외친 인물이었다.


하지만 막상 대공황이 닥치자 은행 주가가 폭락했다. 그러자 이를 방어하기 위해 무리한 차입을 통해 회사의 자사주를 매입했다가 엄청난 손실을 보게 된다.


비단 은행만 주식 투자에 올인하여 손해를 본 것은 아니었다. 이보다 더 큰 손실을 입은 곳은 따로 있었다.


바로 신탁회사(trust company)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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