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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정엽 May 16. 2020

미국 제조업의 태동과 발전

미국 경제 역사 이야기 24

미국의 광활한 지역에서 농업의 중요성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오랫동안 농업의 생산성 향상은 더디게 진행됐다. 이 시기 농업의 가장 중요한 자원은 인간의 노동력이었다.


수확기의 발명가 사이러스 매코믹(Cyrus Hall McCormick)


이를 효과적으로 개선하고자 시도된 노력 가운데, 성공을 거둔 사람은 사이러스 매코믹(Cyrus Hall McCormick, 1809~1884)이었다.


그는 버지니아주 셰넌도어 출신으로, 아버지의 농장에서 밀 수확에 대해 많은 고민과 생각하였다. 당시 밀 농사의 가장 중요한 걸림돌은 생산 방식이었다.


다 익은 밀은 짧은 기간 내 수확해야 했고, 한 명이 수확할 수 있는 범위는 약 4,000 제곱미터였다(그의 아버지 농장 크기는 500만 제곱미터였다).




사이러스 매코믹(Cyrus Hall McCormick)   <출처 : 위키피디아>


아무리 밀이 많아도 수확할 수 있는 노동력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는 수확 방식을 여러 단계로 나누어 한 번에 수확할 수 있는 기계를 만들었다(1834년 6월 특허 승인). 처음 출시되었을 때 농부들의 무관심과 유사 제품의 범람 등으로 몇 년 동안 거의 판매가 안 되었다.


1845년 영국의 옥수수법 폐지로 미국산 밀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는 1847년 운송에 유리한 지역인 시카고에 공장을 세우고 대량생산을 시작했다.


1851년 영국 런던에서 열린 ‘만국 산업제품 박람회(Great Exhibition of the Works of Industry of All Nations)’에 자동 수확기를 출품해 상도 받았다.


만국 산업제품 박람회(Great Exhibition of the Works of Industry of All Nations)  <출처 : 위키피디아>

 

이후 판매량이 증가, 1865년까지 2만 3,000여 대가 팔렸다.


자동 수확기는 북군의 남북전쟁 승리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남군이 노예의 노동력에 의존하는 동안, 북군은 농업의 기계화를 통해 적은 인원으로 곡물의 생산량을 증가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남북전쟁 중에도 농업의 기계화는 지속해서 확대되었고  수확량은 증대되었다. 많은 양의 곡물을 유럽에 수출하기 시작했다. 남북전쟁이 종전되고 12년 뒤인 1876년 미국은 세계 최대의 곡물 생산국이 되었다.


미국 산업혁명의 아버지 새뮤얼 슬레이터


미국은 제조업의 나라다. 이런 상황에서 제조업의 아버지라 명칭을 받은 이가 있었으니, 새뮤얼 슬레이터(Samuel Slater, 1768~1835)였다.


그는 영국 태생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면직 공장에서 도제 수업을 통해 바닥부터 업무를 배워 나갔다. 21살이 되던 해, 자신만의 사업을 꿈꾸며 미국으로 건너왔다.


새뮤얼 슬레이터(Samuel Slater)  < 출처 : 위키피디아>


모세 브라운(Moses Brown)이란 사람의 직조 기계 공장에서 하나하나 새로운 기계들을 만들고 추가하면서 방적 공장을 운영하게 된다.


당시 영국은 첨단 기술의 유출을 방지하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외국으로의 이주는 물론 여행도 금지되었다.


하지만 슬레이터를 통해 전파된 직조 기술은 미국 로드아일랜드의 공장에서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미국의 산업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기술을 뺏긴 영국은 슬레이터를 배반자, 산업스파이라고 불렀지만, 미국에서는 ‘미국 산업혁명(앤드루 잭슨이 만든 용어)의 아버지’로 알려져 있다.


슬레이터 빌(Slatersville)   <출처 : 위키피디아>


그가 처음 수력 방적 기술을 선보이고 재무장관 알렉산더 해밀턴에게 알렸을 때, 해밀턴은 크게 기뻐하며 전폭적으로 지원해 주었다. 그는 큰 성공을 거두고 연이어 뉴잉글랜드에 많은 공장 들을 설립했다. 로드아일랜드에서는 슬레이터 빌(Slatersville) 마을을 건설하였다.


세계 최초의 직물공장을 설립한 프랜시스 로웰(Francis Cabot Lowell)


그의 뒤를 이어 두 번째로 산업 기술을 성공한 사람이 있었다. 이름은 프랜시스 로웰(Francis Cabot Lowell, 1775~1817)이었다.


그는 매사추세츠주 보스턴의 명문 집안에서 태어났다. 하버드를 졸업한 그는 영국으로 건너가 영국 섬유산업의 모든 과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당시 영국은 모직물 산업에서 면직물로 이동을 하고 있었다. 제니 방적기의 발명 이후 미국 목화를 바탕으로 전 세계 공급량 절반 이상의 면 제품을 수출하고 있었다.



1813년 보스턴 제조회사(Boston Manufacturing Company)  <출처 : 위키피디아>


로웰은 영국 동력 직조기 기술을 파악한 뒤 미국으로 돌아갔다. 1813년 공장을 세운 그는 매사추세츠주 월섬에서 보스턴 제조회사(Boston Manufacturing Company)를 설립했다. 원면을 완성된 천으로 변환하는 작업을 한 공장에서 완성할 수 있는 회사였다.


 이후 기계화된 섬유 시스템 산업은 한 세기 동안 주력산업이 되었다.


이 공장은 농업 지역의 여성(15세~35세)을 섬유 노동자로 고용하는 것을 시도했고, 이들은 회사가 운영하는 기숙사 생활을 하며 종교 및 교육활동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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