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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정엽 Jun 03. 2020

금융 황제 JP모건 1

미국 경제 역사 이야기 42

미국 금융역사에서 가장 먼저 손꼽히는 인물은 존 피어폰트 모건(일명 J.P.모건, John Pierpont Morgan, 1837~1913, 이하 모건)이다. 


모건 가문의 시작


모건은 로스차일드 가문(Rothschild family)처럼 수세기를 내려온 전통적인 금융가 가문 출신은 아니다. 그로부터 시작된 금융가의 명성은 미국 금융사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젊은 시절의 존 피어폰트 모건 <출처 : 위키피디아>


그는 미국 코네티컷 주 하트퍼드에서 태어났다. 


집안은 상당한 부유층이었는데, 아버지 주니어스 스펜서 모건(Junius Spencer Morgan, 이하 스펜서 모건)은 일찍이 미국 은행가 조지 피바디(George Peabody, 1795~1869)가 1835년 런던에 설립한 조지 피바디 앤 컴퍼니(George Peabody & Co.) 사의 미국 지역 파트너로 일하고 있었다.


조지 피바디


미국 최초의 국제 금융인으로 불렸던 조지 피바디는 매사추세츠 덴버에서 1795년에 태어났다. 


특이하게도 런던에서 주로 활동을 했는데, 높은 도덕성과 자기 관리, 금융에 대한 높은 통찰력으로 금융계에서 명성이 자자한 인물이었다. 


조지 피바디  <출처 : 위키피디아>


그는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 은퇴 후 자선사업에 남다른 열정을 보여 자신의 재산 대부분을 기부하거나 도서관, 미술전시관, 박물관에 많은 기금을 지원했다. 


예일대 자연사 박물관과 1866년에 설립된 하바드 고고학 민속학 박물관은 특히 유명하다. 


모건의 아버지, 스펜서 모건


피바디가 금융계에서 은퇴하면서, 그의 회사를 이어받은 스펜서 모건은 회사 이름을 ‘J.S. 모건 앤 컴퍼니(J.S. Morgan & Co.)’로 개명했다. 


이어 피바디가 구축해 놓은 해외 네트워크를 활용하여 미국에서 영향력 있는 국제은행으로 성장시켰다.


스펜서 모건  <출처 : 위키피디아>


시대적인 상황은 남북전쟁 이후 산업화가 막 시작한 단계였다. 


자본을 원활히 공급할 만큼 금융시장의 규모가 크지 않았다. 때문에 규모가 큰 기업이나 주 정부가 재원이 필요한 경우, 해외에서 자금을 조달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외국(주로 영국)에서 인기가 높았던 것은 미국 내 철도 회사의 주식과 채권, 주 정부가 발행한 채권이었다.


이런 채권과 주식을 외국 투자자들에게 판매하는 역할을 맡아 업무를 진행한 곳을 ‘상인은행(merchant bank, 일명 머천트 뱅크라 불렀다. 투자은행의 전신이다)’이라 불렀다. 


 ‘J.S. 모건 앤 컴퍼니’는 상인 은행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이런 배경에서 모건은 1857년에 아버지가 경영하는 J.S. 모건의 런던 사무소를 통해 본격적으로 은행업계에 입문했다.


다양한 회사를 거쳐 충분한 경험을 쌓은 그는 1871년 앤소니 드렉셀(Anthony J. Drexel, 1826~1893, 필라델피아의 유명한 은행가)과 합작하여 드렉셀 모건 앤 컴퍼니(Drexel, Morgan & Company, 1895년에 J. P. 모건 앤 컴퍼니로 바뀌게 된다)를 설립했다.


앤소니 드렉셀  <출처 : 위키피디아>



모건의 유럽 문화 습득


모건은 어린 시절 하트포드와 보스턴에서 생활하다가 이후 스위스와 독일에서 학업을 배웠다. 그리고 런던에서의 생활을 통해 영국 문화에 대한 거부감을 갖지 않게 됐다.


미국과 영국의 문화를 동시에 흡수하고 이를 수용하고 활용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영국 투자가들은 자신들과 문화적인 공통점을 가진 모건에게 높은 신뢰감을 가졌다.


드렉셀 가문과의 결합은 아버지인 스펜서 모건의 도움을 받았지만, 이를 본격적으로 확장한 것은 온전히 그의 능력이었다. 


당시 런던에 이어 새로이 자본의 공급처로 부각되고 있던 뉴욕 월스트리트에서 그의 역할은 단순히 개인 은행가의 영역을 넘어 ‘투자하는 은행가’의 역할로 확장하였다. 시작은 철도 산업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철도회사 투자와 이사회 참여


급성장하고 있는 철도 산업에 투자한 영국과 미국 투자자들을 대신하여 경영에 참여했다. 과잉 중복투자와 가격 경쟁으로 이익을 거의 내지 못하고 있던 철도 사업 체계를 교통정리하기 시작했다. 


2000년 J.P. 모건  로고  <출처 : 위키피디아>


이 시기 철도 산업은 경영진의 부패와 사기가 만연하여 적자를 면치 못한 경우가 많아 거의 배당을 하지 못했다.


그는 주주들의 힘을 이용해 철도 경영에 개입, 효율화를 강력히 추진함으로써 투자자들의 이익을 대변해 주는 역할을 담당했다.


결국 금융 자본이 산업 자본을 지배하는 선례를 남겼다. 주주들을 대신하여 금융 기관이 회사의 경영권을 지배하는 이사회의 역할을 담당했기 때문이다.


이후 단순히 자금을 조달하는 역할에서 한발 더 나아가 직접 경영에 관해 자문하고 지원하는 투자은행(investment bank)으로 발전했다. 


J.P 모건 체이스  <출처 : 위키피디아>


무분별한 가격 경쟁으로 파산하고 있던 다른 철도 회사의 경영에도 참여했다. 전문가를 통해 구조조정을 이루어 냈다. 


이런 과정에서 모건은 수십 개의 철도 회사에 자신의 대리인을 이사에 선임시켰다. 미국 철도산업의 3분의 1 규모가 모건의 영향력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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