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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정엽 Jun 04. 2020

금융 황제 JP모건 2

미국 경제 역사 이야기 43

JP모건이 투자은행가로서 활약상을 보여준 것은 1879년 뉴욕 센트럴 철도(New York Central Railroad)의 주식 매각 건이었다.


투자은행가 모건


당시 최대의 철도 재벌이었던 코넬리어스 밴더빌트(Cornelius Vanderbilt)는 장남인 월리엄 H. 밴더빌트(William Henry Vanderbilt, 1821~1885)에게 유산을 남겼다. 그는 물려받은 주식 일부를 매각하고자 모건에게 의뢰를 했다.


월리엄 H. 밴더빌트   <출처 : 위키피디아>



모건은 영국의 투자자들을 유치하여 주식의 급격한 가격 하락 없이 깔끔하게 매각에 성공했다.


이에 더해 이사로 선임이 되어 철도산업의 사업적 효율성을 진행하게 되면서 본격적인 명성을 얻었다.


다음 해에 북태평양 철도 회사(Northern Pacific Railroad Company)에도 투자, 이사회에 자리를 확보하였다.  


모건은 단순히 철도 산업에만 참여한 것은 아니다. 유명한 발명가 토마스 에디슨(Thomas Edison)의 제너럴 일렉트릭(General Electric, GE사)의 설립에 참여했다.


이후 전기 생산을 위한 발전소 건설에도 관여하여 다양한 산업 군에 자본을 투자하는 역할을 맡았다.


JP모건의 눈매는 매섭기로 유명했다.  <출처 : 위키피디아>


가장 명성을 높인 것은 1901년 유나이티드 스테이츠 제철회사(United States Steel Corporation, 이하 US스틸)를 설립한 것이다.


US스틸 출범


그는 철강 산업의 진출을 위해 몇몇 중소형 철강 회사들을 규합해 1898년 페더랄 제철회사(Federal Steel Company)를 설립했다.


이후 당시 최대 철강회사의 설립자인 앤드류 카네기(Andrew Carnegie)를 설득하여 그의 카네기 제철회사(Carnegie Steel Company) 지분을 인수하는 데 성공했다. 추가적으로 록펠러가 소유한 철광업체까지 인수에 성공, ‘US스틸‘을 출범시켰다.


당시 회사 자본 규모는 14억 달러였으며, 이는 세계 최초로 자본금 규모가 10억 달러를 넘은 회사였다. 시장점유율은 자그마치 65%를 넘었기에 세계 최대의 제철 회사 였다.



록펠러와 모건의 트러스트 연계 그림 <출처 : 위키피디아>


이런 과도한 트러스트는 시장의 독점적 위치에 올라 공정하고 정당한 경쟁을 방해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시대적 상황(도금 시대)은 몇몇 개인의 이익을 위해 공공의 이익을 제한할 수 있다는 인식이 퍼져 있는 상황이었다. 별다른 제재를 받지 않았다.


이로 인해 1890년 셔먼 반독점금지법(Sherman Antitrust Law)이 생겨났다. 그렇지만 실제적 집행은 어려운 상황이었다.


셔먼 독점금지법


1895년 미국 법무부가 셔먼 반독점법 위반 혐의로 고소한 회사와의 재판에서 패소했다. 트러스트의 숫자가 더 늘어났다. 부의 쏠림과 대물림 현상은 가속화되었다.


셔먼 상원의원. 셔먼 독점금지법의 주인공이다. <출처 : 위키피디아>


당시 모건은 석유 산업(록펠러의 스탠더드 오일(Standard Oil)이 가장 큰 규모로 장악하고 있었다)을 제외하면 전 산업에 끼치는 영향력이 막강했다.


자신의 금융회사 직원을 각 기업의 이사로 파견하여 경영권에 대한 일정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영향력으로 금융이 산업을 지배하는 영역을 넘어, 전방위적인 구조개선을 통해 효율성을 강화함으로써 지나치게 비대해진 사업을 정리해 나갔다.


하지만 당연히 손해를 보는 쪽은 발생했다.


1901년 부통령이던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윌리엄 맥킨리(William McKinley) 대통령이 암살당하고 부통령이었던 루스벨트가 대통령 직을 승계함)


루스벨트의 본격적인 트러스트 견제가 시작되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 < 출처 : 위키피디아>


산업의 독점에 대상이 되었던 대표적인 회사는 록펠러의 스탠더드 오일(Standard Oil Co. Inc)과 모건의 노던 시큐리티사(Northern Securities Company)였다.


트러스트 해체와 금융위기 극복


각각 산업과 금융의 대표적인 트러스트였다.


반독점에 대한 소송을 먼저 제기당한 것은 노던 시큐리티사 였고 결국 1902년 법원에 의해 분할 명령을 받게 됐다.


1910년에는 법무부에 의해 석유 독점기업이었던 스탠더드 오일이 소송을 당하고 이 또한 1911년 34개 회사로 해체가 됐다.


모건의 역할을 묘사한 그림  <출처 : 위키피디아>


이런 상황 에서도 모건은 1907년 미국에 닥친 경제위기를 자신의 인맥과 자본력, 과감한 결단으로 해결했다.


해결 후, 여론은 호의적이지 않았다. 연방정부보다 더 막강한 모건의 영향력을 두려워한 사람들에 의해 정치적인 견제를 받게 됐다. 청문회까지 열렸다.


1912년 5월부터 1913년 1월까지 아슨 푸조(Arsène Pujo) 의원에 의해 시행된 ‘푸조위원회’에서  모건은 집중 공격을 받았다.


모건과 아들 잭 모건  <출처 : 위키피디아>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은 그는 청문회가 끝나고 1913년 가족과 휴양을 떠났다. 얼마 후 이탈리아 로마에서 사망했다.


기막힌 운명으로 '제2 미국은행'이 종료된 1837년에 태어나 세 번째 중앙은행의 근간이 되는 ‘연방준비제도’가 탄생된 해에 죽은 것이다.  


자신의 능력과 영향력을 구사해 두 번의 경제위기(1893년, 1907년)를 극복했다.


그는 중앙은행이 해야 할 일을 대신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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