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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정엽 Jun 06. 2020

1907년 금융위기와 JP모건

미국 경제 역사 이야기 45

1900년대 들어서 산업화의 영향으로 경제 회복과 무역의 교역량이 크게 증가하였다.


 어거스투스 하인즈와 유나이티드 코퍼


연방정부의 세 수입도 늘어나 호황의 시기에 진입했다.


이런 시기는 커다란 경제적 사건사고 없이 조용히 진행되기를 바라는 심리가 높았다. 하지만 사건은 예외 없이 예상하기 힘든 곳에서 발생했다. 처음엔 연관된 경제적 효과도 크지 않을 것이라 낙관하고 있었다.


서부 애리조나 뷰트에서 발생한 ‘구리 전쟁’은 시작 초기에 이슈가 될만한 경제적 사건은 아니었다.


F. 어거스투스 하인즈(F. Augustus Heinze)라는 사람이 '구리 전쟁' 과정에서 자신의 광산을 상당한 고가에 매각했다. 인수한 곳은 록펠러 그룹 내 회사였다. 하인즈와의 오랜 소송 끝에, 더 이상 손해를 보기 싫어 울며 겨자 먹기로 회사를 통째로 인수한 것이다. 


하인즈는 매각 대금으로 월스트리트로 진출, 금융회사를 인수했다. '유나이티드 코퍼(United Copper Co.)'라는 구리 광산회사도 설립했다.



어거스투스 하인즈  <출처 : 위키피디아>


당시 ‘몬태나의 구리왕’이라 불리는 하인즈 (F. Augustus Heinze)는 1869년 뉴욕 브루클린에서 태어났다.


그는 맨해튼에 있는 컬럼비아 대학에서 토목공학을 공부한 뒤 서부 몬태나 주로 와서 말단 측량기사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이곳에서 정직하지 못한 방법으로 구리 광산의 채굴을 통해 부를 축적했다. 1906년 2월 회사를 소송 중이던 록펠러 회사에게 매각하고 그 대금을 가지고 뉴욕으로 돌아왔다.


뉴욕으로 온 그는 더 큰 투자금을 끌어 모으는 것이 용이한 금융업에 투자했다. 당시 부자 중 하나인 찰스 모스(Charles W. Morse)와 연합도 했다.


얼음 사업  <출처 : 위키피디아>


얼음 왕 찰스 모스와 동업


찰스 모스는 얼음 왕(The ice King)이라 불릴 정도로 얼음 사업을 벌여 나갔다.


1899년 뉴욕의 21개 얼음 회사를 몽땅 결합하여 독점 얼음 회사를 만들어 공급해 큰돈을 벌었다. 그러나 뉴욕 월스트리트에서는 악명 높은 사업가이자 투기꾼이었다. 정치인들에게 뇌물을 주고 이들의 보호를 받으며 사업을 운영해 나갔던 것이다.


이 둘은 서로 의기투합하여 주가 조작을 통해 큰돈을 벌기로 하였다. 그 대상이 된 회사가 ‘유나이티드 코퍼(United Copper Co.)'였다.


구리 매점매석을 통해 주가를 올리려는 전략을 세우고 막대한 자금을 동원, 주가 띄우기에 나섰다.


하지만 그의 주가 작전이 록펠러 회사의 공격에 의해 철저히 무너져 버리자 상황이 급변했다.


가진 돈 없이 마진론(보유 주식을 담보로 은행 등의 금융회사로부터 빌린 돈)으로 주식 부양에 나섰던 그는 빌려온 자금의 상환 압박에서 벗어나고자 헐값에 주식을 팔아야만 했다.


찰스 모스(가운데)  <출처 : 위키피디아>


하지만 동업자로 참여였던 찰스 모스의 머컨타일 내셔널 은행(Mercantile National Bank)에서 뱅크런이 발생했다. 이 때문에 연계된 수많은 은행 및 신탁회사에 대한 대량 예금인출 사태(뱅크런)가 발생했다.


니커보커 트러스트의 파산


바로 뒤를 이어 뉴욕 3대 은행인 니커보커 트러스트(Knickerbocker Trust Co.)에도 대량 예금인출 사태가 생겼다.


당시 이 은행의 지점장이었던 찰스 바니(Charles T. Barney)가 이번 주가조작에 연관되었다는 소문이 나온 것이다(찰스 바니는 은행을 살리기 위해 노력했으나 모든 것이 어려워지자 1907년 11월 권총 자살을 했다)



찰스 바니  <출처 : 위키피디아>


결국 예금 인출 요구를 감당하지 못한 회사는 파산했다.


당시 신탁회사는 은행과 달리 뉴욕 청산소에서 급히 사용할 자금을 지원받을 수 없었다.


은행의 경우 지급준비금을 25퍼센트까지 보유하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신탁회사는 그 비율이 5퍼센트 내외였다. 유동성 차원에서도 쉽게 무너질 수 있는 약한 구조였다. 규제를 받지 않고 있었다.


파산에 대한 불안감이 펴지면서 타 신탁회사까지 자금 인출 요구가 증가했다.


1907년의 공황(Panic of 1907)


신탁회사들이 지급 요청을 대응하기 위해 보유하고 있던 자산을 매각(주식, 채권 등)하기 시작하자 금융시장이 출렁였다. 쏟아지는 매물로 인해 결국 전체 금융시장으로 충격이 번진 것이다.


고객의 불안한 심리적 공황이 급속한 금융 공황으로 번진 것이다.



1907년 금융공황 당시의 대량 예금인출  <출처 : 위키피디아>


결국 뱅크런에 의한 유동성 부족은 패닉 현상까지 불러왔다.


1907년에 발생된 금융 공황은 1929년의 대공황만큼 심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당시 에는 금융시장 전체를 혼란에 빠트린 사건이었다.


돈을 찾으려는 이는 많은데, 지급해 줄 돈이 없는 상황. 결국은 누군가 이 돈을 공급해줘야 살아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결국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구제 금융을 제공할 수 있는 그 누군가가 있어야 했다(2008년 금융위기 때에는 연방준비제도가 역할을 담당했다. 이 당시에는 최종 대부자격인 중앙은행이 존재하지 않았다)


J.P 모건의 등장


여행 중에 이러한 소식을 들은 JP모건은 급히 뉴욕으로 돌아왔다.


자신의 참모들을 동원, 상황 파악에 나섰다. 당시 참석자 중에는 추후 뉴욕 은행장이 되는 벤저민 스트롱(Beniamin Strong, 1872~1928)도 있었다.



벤저민 스트롱 <출처 : 위키피디아>


모건은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에 대해 특유의 판단력으로 무엇이 필요하고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를 바로 파악했다.


먼저 가지고 있던 자금과 재무부의 특별 승인을 받은 연방정부 자금(약 3,500만 달러), 자신의 네트워크를 발휘해 동원한 은행 자금을 예금 인출이 심각한 은행과 신탁회사에 즉각 투입했다.


추가적으로 신탁회사의 예금 인출이 더 진행되지 않도록 설득도 했다.


잠시 시장은 숨을 고르는 듯 안정감을 찾았지만, 한번 불기 시작한 불안감은 다시 휘몰아쳤다.


모건의 도서관 회동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하고 은행이 지원받은 자금은 점점 줄어들면서, 상황이 더 심각해졌다. 조금만 지속되면 결과는 불을 보듯 뻔했다. 모건 자신도 파국을 맞이할 판이었다. 결국 과감한 조치를 취했다.


금융권의 인사 50여 명을 자신의 서재로 불러 모은 뒤, 대책을 마련할 때까지 모두 나갈 수 없도록 문을 걸어 잠갔다.


서재에 갇힌 은행가들의 극적인 타협을 거쳐 2,500백만 달러 상당의 구제금융이 마련되고, 이는 즉시 공급이 되었다.



JP모건의 도서관  <출처 : 위키피디아>


결국 3주에 걸친 금융위기는 극복되었다.


모건에 의해 주도된 이 날의 ‘서재 회동’은 이후 금융위기 시 곧잘 회고되는 유명한 사건 중 하나이다.


모건의 노력으로 금융위기를 극복하게 되자 언론을 비롯한 각계에서 그에 대한 칭송은 끊이지 않았다. 심지어 루스벨트 대통령까지 그에게 감사의 뜻을 전했다.


연방정부의 충격


하지만 속사정은 그렇지 못했다.


연방정부는 큰 충격을 받았다. 국가의 위급한 시기에 해결해 주는 곳은 월스트리트라는 현실이 너무도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것이다.


연방정부의 조정 능력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생겼다. 실천에 옮겨야 한다는 인식이 퍼졌다.


이런 위기의식은 1908년 의회에서 ‘알드리치-브릴랜드 법(Aldrich-Vreeland Act)’법을 통과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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