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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정엽 Jun 07. 2020

우드로 윌슨과 '연방준비법'

미국 경제역사 이야기 46

1907년 J.P. 모건에 의해 금융위기가 해결되었다.


알드리치-브릴랜드 법


연방정부와 금융가들은 ‘과연 또다시 이러한 위기가 닥친다면 그땐 어떻게 할 것인가? 또다시 모건에게 의지할 것인가?’라는 의문을 가졌다.


1907년 공황의 다우존스 지수  <출처 : 위키피디아>


이 당시 미국의 경제 상황은 자동차가 주요 운송수단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관련 산업의 성장도 눈부시게 발전했다. 문맹률은 10% 내외였고 국민 총생산액도 영국을 추월하고 있었다.


경제 규모가 점점 커졌다. 금융도 변해야 했다.


금융의 전반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책 마련이 대두되었다. 공감대가 형성되자 의회에서 본격적인 준비에 들어갔다.


1908년 의회는 알드리치 상원의원(Nelson W. Aldrich, 1841~1915)이 주동이 되어 작성된 ‘알드리치-브릴랜드 법(Aldrich-Vreeland Act)’을 통과시켰다.


목적은 긴급 위기 시, 필요한 유동성을 적시에 공급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는 것이다.


미국 상원 로고  <출처 : 위키피디아>


첫째, 긴급한 시기에 화폐의 공급이 부족할 경우, 연방정부 및 주정부의 채권을 기초로 하여 화폐를 공급할 수 있게 허가를 내주었다.


둘째, 자본금 500만 달러 이상인 10개 이상의 국립은행(national banks)을 합쳐 '국가 통화연합(National Currency Association)'을 만들어 위기 발생 시 유동성(화폐) 공급이 가능하도록 했다.


아울러 금융시스템 개혁을 연구하기 위한 '국가 통화 위원회(National Monetary Commission)' 설치를 규정했다.


이 ‘국가통화위원회’의 목적은 미국 통화제도의 안정성을 높이기 위한 방안을 연구하는 것이다. 상하원 의원 각각 9명으로 구성되었다.


넬슨 알드리치 상원의원   <출처 : 위키피디아>


위원장은 로드 아일랜드 주 상원의원이었던 넬슨 알드리치(Nelson W. Aldrich, 1841~1915)가 맡게 됐다.


넬슨 알드리치와 알드리치 플랜


넬슨 알드리치는 1841년 로드 아일랜드에서 태어났다.


1890년대 주요 의사결정을 진행했던 공화당 ‘빅 4’ 중의 한 사람이었다. 미국 동부 은행가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보수세력의 핵심이었다.


은행가를 대표하는 인물이 법안 설립에 앞장섰다. 뉴욕 월스트리트에서도 금융시장을 관리할 중앙은행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었던 것이다.


은행가 측은 자신의 능력으로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연방정부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는 사실에 당황하고 있었다. 또다시 금융위기가 발생된다면, 근본적인 해결책을 사전에 마련해 두어야 한다는 공론이 강했다.  


긴급통화를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시스템 마련이 필요했다. 1836년 이후 중단된 중앙은행의 설립에 대해 서둘렀다.


3년간 ‘국가통화위원회’는 유럽의 중앙은행 및 영국의 잉글랜드 은행을 시찰했다.


미국의 금융 현황 등을 광범위하게 조사한 보고서를 제출했지만 진전은 없었다.



워싱턴 D.C의 연방준비제도  <출처 : 위키피디아>


이후 알드리치 위원장을 비롯한 월스트리트 주요 인사들이 참석하여 1910년 11월 조지아 주 지킬 섬의 J.P. 모건 별장에서 별도의 회합을 갖았다.


여기서 정리, 작성되어 연방정부에 제출된 자료가 ‘알드리치 플랜(Aldrich Plan)’이다.


핵심 내용은 유럽 방식의 중앙은행을 설립하되, 지배 구조를 정부가 아닌 민간 주도로 구성하는 것이다. 연방정부가 금융 문제에 개입하는 것을 사전에 차단했다.  


우드로 윌슨 대통령의 당선


하지만 뜨거운 논쟁을 불러왔다.


화폐 공급의 결정권을 정부가 아닌 은행에게 넘겨주다는 비판을 받게 되었다. 알드리치 의원의 딸이 록펠러 2세와 결혼했다는 사실의 부정적 여론까지 겹치며 결국 의회에서 최종 채택이 부결되었다.


1912년 대통령 선거에 돌입하면서 각 당의 주요 쟁점 중 중요하게 부각된 것이 ‘알드리치 플랜’과 ‘금융 개혁’이었다.

 


우드로 윌슨 대통령  <출처 : 위키피디아>


당시 출마한 대통령 후보는 공화당의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대통령, 제3당을 만들어 출마한 진보당의 시어도어 루스벨트, 민주당의 우드로 슨(뉴저지 주지사)이었다.


공화당 내 태프트 대통령과 루스벨트 전 대통령 간의 갈등과 분열 끝에 결국 제28대 대통령으로 민주당 토머스 우드로 슨(Thomas Woodrow Wilson, 1856~1924)이 선출됐다.


민주당이 16년 만에 정권을 잡은 것이다.  사실상 ‘알드리치 플랜(Aldrich Plan)’의 앞날은 어두웠다.


하지만 극적인 변화가 발생했다.


1912년 12월, 대통령 취임을 앞둔 윌슨은 카터 글라스(Carter Glass, 1858~1946))의원을 불렀다.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담은 중앙은행 설립법에 대한 수정안을 지시했다.


바로 수정안을 작성하기 위한 재검토에 들어갔다.


카터 글라스 의원의 수정안


이후 카터 글라스의 수정안이 처음 공개되자, 은행가를 대표하는 월가와 농민을 대표하는 진보 측 모두 반대 의견을 제시했다.


이유는 금융 문제 해결에 중앙정부의 지나친 간섭이 심하다(은행가)는 의견과 중앙은행 운영에 연방정부의 권한이 너무 제한적(진보 측)이라는 의견이 제시된 것이다.


카터 글라스  <출처 : 위키피디아>


제도의 운영 측면에서 공화당의 의견을 받아 추가 수정이 반영되었다. 그렇지만 전체적인 방향은 조정되지 않았다.


1913년 12월 19일 진행된 상원 투표에서 글라스 의원의 법안이 공화당의 자체 수정 법안을 제치고 44대 41로 최종 승인이 됐다.


1913년 연방준비법(Federal Reserve Act) 승인


이후 하원에서도 54대 34로 표를 받아 ‘연방준비법(Federal Reserve Act)’이 최종 통과가 되었다.


크리스마스를 이틀 앞둔 12월 23일, 슨 대통령이 최종 서명을 했다. 대통령 취임 1년도 안된 시점에 중앙은행 설립이 가능한 금융개혁법안을 완성시킨 것이다.


이 법안을 통해 미국은 세 번째 중앙은행을 준비했다.


1914년 연방준비위원회(Federal Reserve Board)가 설립됐다.


법안의 주요 내용은 효율적인 화폐의 공급 및 관리, 은행에 대한 체계적인 관리 감독 권한 부여였다.


최종 대부자 역할(대출 기관)을 담당하는 12개 지역 연방준비은행을 구성하는 연방준비제도 이사회의 구성 내용도 담겨 있었다.



연방준비제도 휘장  <출처 : 위키피디아>


1933년에는 연방 공개 시장위원회(FOMC)를 만들기 위해 개정이 되었다.


이후 연방준비제도 이사회에 ‘최대 고용을 위한 일자리 창출, 물가 안정, 적절한 장기 금리의 목표를 효과적으로 촉진’ 한다는 내용이 추가되었다.


지금의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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