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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정엽 Jun 09. 2020

제1차 세계대전 후 미국 경제의 성장

미국 경제 역사 이야기 48

'제1차 세계대전'은 미국의 경제적 위치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채권국가로의 전환


전쟁이 발발하기 전 유럽 국가의 채무(약 37억 달러)를 갚아 나가던 나라였다. 전쟁 후에는 유럽 국가로부터 최대의 채권(약 126억 달러)을 가진 국가로 바꼈다.


가능했던 것은 유럽 각국으로부터 요청이 들어온 차관이었다.


영국-프랑스 금융위원회 멤버 <출처 : 위키피디아>


영국은 전쟁이 발발하면서, 미국으로부터 수입할 전쟁물자 예산을 5000만 달러로 책정했다. 실제로 집행된 금액은 약 30억 달러였다. 처음 계획 대비 60배 이상의 지출이 발생되었다. 당시 1916년 연방정부 세입 규모의 네 배를 넘는 금액이었다.


폭발적으로 늘어난 전쟁 비용을 감당하기에 자국의 자본만으로 공급의 한계가 뚜렷했다. 결국 미국으로부터 차관을 도입하기 위한 방법을 찾게 됐다.


당시 윌슨 대통령은 고립주의 정책의 시행으로 미국의 참전을 사실상 불허한 상태였다. 연방정부가 나서서 차관 제공을 주도하기에 반대의 목소리가 높았다.


국무장관 월리엄 제닝스 브라이언은 교전 당사자들에게 절대 차관을 제공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얼마 후, 로버트 랜싱으로 국무장관이 교체되었다. 랜싱은 윌슨 대통령을 설득했다.


미국 금융자본의 성장


미국 경제의 지속적인 확장을 위해 유럽 국가의 차관 제공이 필수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마침내 대통령 승인을 받았다. 하지만 연방정부가 직접 실행은 못했다.


잭 모건(John Pierpont "Jack" Morgan Jr.)  <출처 : 위키피디아>


이를 해결하기 위해 금융 자본들이 나섰다.


1915년 J.P. 모건 은행은 영국 정부의 대표단과 계약을 맺었다. 미국에서 군수물품 위탁 구매를 책임지게 됐다. 초기 금액은 약 5억 달러 규모였다. 점차 증가하여 전쟁이 끝날 무렵 약 15억 달러 규모로 증가됐다.  


막대한 공급 약은 J.P. 모건 은행 등 은행 자본가들의 영향력을 더 키워주었다. 산업계에 미치는 영향력은 막강해 졌다.

  

'치머만 전보'와 루시타니아(Lusitania) 호 격침 사건


1915년 5월 7일 독일 잠수함의 어뢰 공격이 발생다. 영국 민간 여객선 루시타니아(Lusitania) 호가 아일랜드 남쪽 해안 근처에서 격침되어 침몰된 것이다.


 이 배의 침몰로 약 1,200여 명의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미국인은 126명이었다.


루시타니아(Lusitania) 호 격침  <출처 : 위키피디아>


이 사건으로 미국인들이 받은 충격은 엄청났다.


당시 민간인을 태운 비무장 여객선을 침몰시킨 사례가 없었기 때문이다. 독일의 공격에 분노했고 중립의 입장에 섰던 이들도 전쟁에 참전해야 한다는 의견으로 돌아섰다.


윌슨은 강력한 항의문을 발표하였다. 독일 잠수함의 불법행위에 대해 경고하는 것으로 마무리 지었다.


참전은 불가능해 보였고, 1916년에는 ‘전쟁에 참전하지 않겠다’는 공약으로 재선에 성공했다.


하지만 우연한 사건으로 전쟁에 참여하게 됐다.


1917년 독일 외무장관 아르투르 치머만(Arthur Zimmermann, 1864~1940)이 1월 16일 자로 멕시코 주재 독일대사에게 보낸 비밀 전보 한 통의 내용이 공개되었다. 일명 ‘치머만 전보(Zimmermann Telegram)’다.



치머만 전보  <출처 : 위키피디아>


영국 정보부가 내용을 감청, 해독하여 미국 측에 전달한 것이다.


독일이 멕시코. 일본과 동맹을 맺고 미국을 공격하자는 내용이었다. 그에 대한 대가는 재정적 지원과 더불어 옛 멕시코 영토였던 텍사스, 뉴멕시코, 애리조나를 다시 돌려주겠다는 것이었다.

 

미국 여론은 단숨에 전쟁에 참여해야 한다는 의견으로 돌아섰다.


이에 더해 1917년 RMS 라코니아(RMS Laconia)호가 독일 잠수함에 피격되었다. 미국인 승객이 사망하자 여론은 더욱더 악화되었다.


치머만 전보를 풍자한 삽화  <출처 : 위키피디아>


미국의 참전


결국 윌슨 대통령은 1917년 4월 의회에 전쟁 선포를 요청했다.


의회에서 압도적 다수로 가결되어 전쟁에 참여했다. 이를 계기로 미국은 군사적으로 최강국으로 올라섰다. 압도적인 생산력을 바탕으로 육해공군 모두 최신 장비로 무장시킬 수 있었다.


1919년 6월 28일 협약국과 동맹국은 파리 베르사유궁에서 강화조약을 맺었다. 이로써 제1차 세계대전은 공식적으로 종전을 맞이했다.


전쟁의 최종 승자는 미국 산업과 월스트리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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