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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정엽 Jun 10. 2020

광란의 20년대(Roaring Twenties)

미국 경제 역사 이야기 49

전쟁이 끝난 후, 미국 경제는 완전히 달라졌다.


광란의 1920년대


세계 최대의 채권국가로 변신한 것은 물론, 제조업 분야에서 독보적인 위치로 올라서게 되었다.


전 세계 제조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42%였다. 세계 제일의 수출국가였고, 최고 수준의 자본 공급이 가능한 나라였다.


이 시기 자동차 산업은 기존 철도산업의 뒤를 이어 경제를 살리는 원동력이었다. 연관 산업의 범위가 유리, 철강, 고무, 석유 등 광범위한 연계로 이어졌다. 고속도로 건설, 지역 도시 개발 등 어느 한 곳 부족함 없이 성장을 유지했다.


포드 자동차의 모델 T(1925년 모델)  <출처 : 위키피디아>  


근로자의 수입은 전쟁 전에 비해 늘어났다. 전쟁 기간 내내 밀려있던 소비제품의 공급이 시작됐다. 애타게 목말랐던 갈증을 해소하듯 소비의 열기가 달아올랐다.


에디슨의 전구 발명 이후 전기 산업이 발전했다. 본격적인 전기의 확산이 진행되었다. 과거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광명이 제공되었다. 야간에도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근로자의 생산성은 증가했고 기업의 이익도 상승했다. 주가도 과도한 투자 열기로 인해 실적 이상의 상승이 연일 연출되었다.


광고를 통해 알려진 금융 할부 기법이 고급 소비재 시장에 적용되었다. 고가품의 소비가 증가했다. 적절한 빚을 지고 살아가는 게 당연시되는 분위기였다.


금주법 시대 단속 경찰관  <출처 : 위키피디아>


금융계가 벌어들이는 수익도 기대 이상으로 증가하기 시작했다.


투자자금이 증권시장으로 몰려들었다. 라디오의 등장으로 전국에 재즈 열풍이 불었다. 금주법(The prohibition law)의 시행으로 마피아 및 불법 주류제조업자들이 밀주 거래로 떼돈을 벌었다.


폰지 사기(피라미드식 다단계 사기수법)로 유명한 찰스 폰지(Charles Ponzi, 1882~1949)가 등장한 것도 이 시기였다.


찰스 폰지(Charles Ponzi)  <출처 : 위키피디아>


도심에서의 분위기와는 달리, 농촌은 그렇지 못했다.


전쟁이 끝나고 유럽으로의 곡물 수출이 줄어들면서 수입이 줄어들었다. 이동 수단의 발달(자동차의 증가)로 농부들이 도시로 나가기 시작했다. 지역에 위치한 은행과 상점의 매출이 감소했다.


지역 주민을 상대로 한 은행과 상점이 서서히 문을 닫기 시작했다. 도시의 경쟁자(은행, 상점 등)에게 무릎을 꿇은 것이다.


역사에서는 이 시기를  ’ 광란의 20년대(Roaring Twenties, 1920~29)‘라고 부른다.


금융 시장의 활황과 스트롱 총재의 사망


1917년 미국의 전쟁 참전 후 중요하게 시행된 정책은 전쟁비용 마련이었다. 과거 전쟁 경험을 되살려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전시채권을 판매하기로 했다.  


전시채권의 주 매입은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 연준)에서 진행했다. 당시 재무부 장관인 맥아두(William Gibbs McAdoo, 1863~1941)는 지역 연방은행장을 불러 원활히 판매될 수 있도록 요청했다.


과거에 비해 수월하게 자금을 마련할 수 있었다.


맥아두(William Gibbs McAdoo)  <출처 : 위키피디아>


전쟁이 끝날 때까지 발행된 금액은 약 170억 달러였다. 전쟁 물자를 구입하거나 군수품을 제작하기 위한 비용으로 시중에 풀렸다. 전쟁이 끝나자 막대하게 풀린 돈으로 인플레이션을 걱정해야 했다.  


사람들은 애국심으로  연방정부가 발행한 전쟁 채권을 사들였다. ’ 금융 투자‘라는 새로운 방식에 길들여졌다.  


이러한 분위기에 편승되어 주식 투자도 자신의 돈에 추가적인 대출을 받아 투기하는 형태로 발전됐다.


 ' 마진론(margin lending, 주식 등을 담보로 하여 자금을 빌려 주식을 더 사들이는 방법)‘이었다. 증권회사가 고객에게 권장하여 주가 상승을 부채질했다.


이 시기 국내총생산은 전쟁 전보다 약 60% 성장했다. 다우존스 지수는 400% 나 상승했다. 주식시장의 과열은 통제 불능 단계 직전이었다.


연방준비은행은 1928년 이전까지 기준금리를 낮추고 있었다. 반대로 유럽은 금리를 올렸다. 이유는 유럽의 국가들이 자국의 통화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이 결과 투자금이 미국보다 금리가 높은 유럽으로 투자되었다. 투자된 자금은 유럽 내 미국 제품을 구입하거나 차입금 상환에 사용되었다. 선순환 구조가 마련되었다. 미국의 투자금이 유럽을 거쳐 다시 미국으로 돌아온 것이다.



벤저민 스트롱 총재 <출처 : 위키피디아>


이런 상황으로 스트롱 총재는 금리를 올리지 못한 채 유지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과열된 증권시장의 열기를 잠재우기 위해 통화량 조절(금리 인상)을 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1928년 가을 벤저민 스트롱의 뉴욕 연방준비은행이 마침내 금리를 3.5%에서 5.0%로 인상했다. 통화량을 조절하기 시작한 것이다. 조만간 경제 공황이 닥쳐올 것을 염려하고 있었다.  


하지만 건강 상태는 기다려 주지 않았다. 대공황이 발생하기 1년 전인 1928년 10월 폐 수술 후유증으로 5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대공황이 닥쳤을 때 그가 살아있었다면 더 빨리 수습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 만큼, 그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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