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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정엽 Jun 14. 2020

브레턴우즈 체제와 마샬 플랜

미국 경제 역사 이야기 53

드디어 전쟁이 끝났다. 인류의 대 비극이 막을 내렸다.


승자와 패자가 엇갈린 순간, 희비는 남달랐다. 승자는 기쁨에 넘쳤고, 패자는 슬픔과 함께 다가올 재난에 몸을 떨었다. 전쟁에서의 승패뿐만 아니라 경제에서의 승패도 같이 닥쳐왔다.


브레턴우즈 체제


미국의 참전과 연합군의 승리로 결과가 나왔다. 누가 헤게모니를 가져갈지 정리할 시간이 다가왔다.


막대한 군비와 자금을 투입한 미국과 끝까지 독일과 싸워 이긴 영국의 쟁탈전은 전쟁이 끝나기 전부터 시작되었다. 하지만 군사력과 경제적 우열은 명백했고 교통정리에는 별 문제가 없었다.


미국 뉴햄프셔주 브레턴우즈  <출처 : 위키피디아>


명확하게 표현되어 정리된 것이 브레턴우즈 체제(Bretton Woods system)이다.


이 체제는 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1944년 6월부터 7월까지 미국 뉴햄프셔 주에 위치한 브레턴우즈라는 곳에서 열린 ‘브레턴우즈 협정(Bretton Woods agreement)’에서 나온 용어이다.


이 협정은 영국과 미국이 향후 전쟁 후에 진행될 국제 통화 시스템 복원을 위한 논의였다.


44개국 대표 대표 730명이 참가했다. 미국의 해리 화이트(Harry Dexter White, 1892~1948)와 영국의 존 메이너드 케인스(John Maynard Keynes, 1883~1946)가 협정의 주도권을 갖고 있었다.

 


존 메이너드 케인스


중점적으로 논의된 것은 안정적인 환율을 위해 누가 주도권을 가져갈 것인지에 대한 의사결정이었다. 전 세계 경제권을 쥐락펴락 했던 영국 입장에서는 미국과 대응한 위치에 서고 싶었다.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영국의 금 보유량은 전쟁의 과정에서 기존 41억 달러에서 19억 달러로 감소되어 있었다. 미국의 금 보유량은 127억 달러에서 200억 달러로 증가되어 있었다. 전 세계 금 보유량의 70% 였다.  


미국은 자국의 의견을 그대로 집행해도 무방할 만큼 힘이 있었다. 하지만 영국 대표가 그 유명한 케인스 인 만큼 최대한 존중을 해 주고 있었다.


브레턴우즈 회의 <출처 : 위키피디아>


결과적으로 환율 방식은 미국 의도대로 결정이 되었다.


고정환율제로 진행하되, 통화 시스템의 주도권은 미국의 달러를 기준으로 정해졌다. 금 1온스당 35달러로 고정시켰다. 다른 국가의 통화는 달러와 연동 후 고정시켰다.


즉 각 국가의 통화를 금과의 교환이 가능한 달러로 환율을 고정시킨 것이다. 금본위제가 아닌 금환본위제로 전환된 것이다.


금과 달러가 동일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모든 무역의 거래 기준은 달러로 표준화되었다. 무역거래의 기축통화가 달러로 결정되었다(이전 기축 통화는 영국의 파운드였다)


각 나라에 외화가 필요할 경우, 즉시 공급이 가능하도록 국제통화기금(IMF)을 설립했다. 전쟁 이후의 재건과 후진국 개발 지원을 위한 국제부흥 개발은행(IBRD)도 창설했다.


브레턴우즈 체제가 유지되는 동안, 미국 및 유럽 주요 국가들은 자유무역을 기반으로 하여 고도의 성장을 이루었다.


케인스는 브레튼 우즈 협정 후 2년 뒤인 1946년 62세로 세상을 떠났다. 과거의 심장병이 재발하여 ‘심장판막 이상’으로 사망한 것이다.



마샬 플랜(Marshall Plan, 유럽 복구 프로그램)


1946년 전쟁이 끝난 후, 미국과 소련은 각자의 이해관계로 동맹 관계가 약해지고 있었다.


이러한 시기, 윈스턴 처칠(Winston Leonard Spencer Churchill, 1874~1965)은 1946년 미주리주 풀턴(Fulton)의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 대학에서 그 유명한 ‘철의 장막(Iron Curtain)’에 관한 연설을 했다.


이후 ‘냉전(Cold War)‘이라는 전쟁이 시작됐다. 싸움의 수단이 전쟁 무기가 아니었다. 돈과 경제력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았다.



  조지 마샬 국무장관  <출처 : 위키피디아>


미국 국무 장관인 조지 마샬(George Catlett Marshall, 1880~1959, 합참의장 출신)은 1947년 6월 하버드 대학 입학식에서 ’ 마샬플랜(Marshall Plan)‘이라는 조치를 제안했다.


2차 대전 이후 소련을 비롯한 유럽 각 국의 경제 재건을 위해 협력을 다짐했다. 원한다면 미국이 필요한 자본을 공급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유럽에 대한 경제 회복 프로그램 제안이었다.


결과적으로 상당한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마샬은 공로를 인정받아 1953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미국의 원조는 1948년 ~ 51년까지 약 128억 달려 였으며, 유럽 경제를 재건하고 되살리는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마샬 플랜 보고서  <출처 : 위키피디아>


미국은 원조 조건으로 유럽 각 국가의 관세 장벽 철폐와 외환 규제를 완화 또는 취소해 달라는 요청을 했다. 이는 결과적으로 미국의 달러가 유럽에서 다시 미국으로 되돌아오는 역할(미국의 수출 대금 결제)을 했다.


1952년 이후 달러는 영국의 파운드를 완전히 누르고 기축통화의 위치를 확고히 했다.


소련은 마살 플랜을 철저히 거부했고, 동유럽 국가의 움직임도 차단했다.


미국의 행동(마샬 플랜)에 대항하기 위해 1949년 1월 ’ 경제 상호원조회의(Council for Mutual Economic Assistance, 일명 코메콘 COMECON)‘를 만들었다.


참가국은 6개 국가로 소련·불가리아·체코슬로바키아·헝가리·폴란드·루마니아였다. 사실상 소련의 압박에 의한 강제적인 조약이었다. 이는 동유럽 국가들을 소련의 위성국으로 전락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마샬 플랜 로고  <출처 : 위키피디아>


마셜 플랜의 성공은 ’ 브레턴우즈 체제‘를 한층 더 확대시켰다. 미국 주도의 세계 경제가 재편되었음을 알려주는 사례였다.


이후 미국 주도하에 세계은행, 국제 통화기금의 도움으로 관세 인하 움직임이 일어났다.


전 세계 무역의 규모는 종전 후 1970년대까지 약 6배의 증가세를 보여주었다. 무역 대금 기준은 달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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