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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정엽 Jun 17. 2020

베트남 전쟁과 런던 골드 풀

미국 경제 역사 이야기 56

미국과 소련의 냉전은 유럽의 입장에서 나쁘지 않았다.


냉전의 진행과 나토(NATO)의 설립


마살 플랜을 통해 원조를 받은 달러는 자국의 산업을 일으키는 데 사용되었다. 이후에도 보이지 않는 원조를 받아 유럽의 부흥을 이끄는데 중요한 디딤돌이 되었다.


1949년에는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 North Atlantic Treaty Organization)가 설립되었다. 유럽의 안보를 소련의 위협으로부터 지켜주었다.


나토 로고  <출처 : 위키피디아>


이러한 행동은 자금이 투입되어야 했다. 예상 이상의 지출이 발생했다.


유럽 각국은 수출로 들어온 달러를 금으로 태환 했고, 미국의 금 보유고는 점차 줄어들었다. 이러한 때 불난 집에 기름을 부은 것은 베트남 전쟁(Vietnam War, 1955~1975)이었다.



통킹만 사건과 베트남 전쟁


베트남 전쟁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이후 분단된 남과 북의 내전 성격으로 시작되었다.


1964년 8월에 발생된 '통킹만 사건(Gulf of Tonkin Incident)'으로 미국이 참전, 국제전 성격을 갖게 되었다.


케네디 대통령과 맥나마라 국방장관   <출처 : 위키피디아>

 

통킹만 해상에서 북베트남 해군이 미 해군 구축함 USS 매독스 함을 공격한 사건이다. 북베트남은 남베트남 함선으로 오인했다고 발표했다.


이후 다음날인 8월 3일 매독스 함이 재공격당했다는 일명 '제2 통킹만 사건'이 벌어졌다(사실이 아니라는 의견이 많다)


미국은 ‘국가안전보장회의’에서 이 내용을 공식화했다. 미국 의회는 '통킹만 결의'를 의결했다.


1965년 2월 미국 B-52 폭격기를 동원하여 북베트남 폭격을 개시하면서 본격적인 개입이 시작되었다.


베트남 전쟁 시 미군의 폭격  <출처 : 위키피디아>


사실상 냉전하에서 벌어진 자본주의(미국)와 공산주의(소련)의 이념 갈등이 강했다.


미국은 도미노 이론(Domino Theory, 한 국가가 공산화되면 옆의 다른 나라도 공산화된다는 이론. 아이젠하워가 처음 도입함)을 배경으로 남베트남 원조를 정당화하고 있었다.


 전쟁은 단기간에 끝나지 않고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미국의 재정 압박은 갈수록 심해졌다.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 이후 뒤를 이은 존슨 대통령은 ‘위대한 사회’라는 타이틀로 사회 보장을 대폭 확대했다. 지출 씀씀이가 커지면서 연방정부의 재정 적자는 더욱 커져갔다.

 


미국 무역 수지 및 무역 정책 (1895-2015)     <출처 : 위키피디아>


미국의 금 보유고가 점차 줄어들면서 금의 가격이 상승하기 시작했다. 달러를 금으로 태환 하는 양이 점점 더 늘어났다는 것을 의미했다. 미국의 힘 만으로 버티기 힘든 지경에 이르렀다.


재정 적자가 일반화된 미국과 달리 유럽은 안정적인 수출과 경기 회복으로 여건이 좋아졌다.


미국은 금 보유량의 감소로 금 가격이 계속 상승하자 어느 정도 제한할 필요성을 느꼈다.


런던 골드 풀(London Gold Pool) 제도


미국의 제안으로 1961년 11월에 런던 골드 풀(London Gold Pool) 제도가 도입되었다.


먼저 미국과 유럽의 7개 국가 중앙은행이 참여한 공동단체를 구성하였다. 금의 가격이 온스당 35.2달러 이상으로 올라갈 경우, 금을 시장에 매각하여 가격을 안정화시켰다. 금 가격을 유지하는 게 목적이었다.


하지만 각국의 경제적 이해관계는 복잡했다. 금 가격 안정하를 영원히 유지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결국 6년여를 안정적으로 끌고 오던 이 제도는 1969년 프랑스의 반발로 깨졌다.


프랑스 드골 대통령  <출처 : 위키피디아>


프랑스의 드골(Charles André Joseph Marie de Gaulle, 1890~1970) 대통령은 미국이 자국의 인플레이션을 강제적으로 수출한다고 공개적으로 불만을 드러냈다.


미국이 재정적자와 경상수지 적자를 만회하고자 달러를 계속 찍는 것에 대한 불만이었다. 달러의 수가 늘어날수록 가치가 하락되어 세계 금융 체제를 교란시킨다는 내용이었다.


재정적자 증가와 인플레이션의 압박


미국의 입장에서는 적자 구조를 메꾸는 길은 달러의 발행 밖에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해결하는 길은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엄청나게 발행된 달러의 가치를 하락시키거나, 달러의 금태환(금으로 교환)을 포기하는 것이다.


금태환 포기는 2차 대전 후 세계 금융 질서를 지켜온 브레튼 우즈 체제를 종료시키는 것을 의미했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리지도 못하는 미국의 입장에서는 기축통화를 절대 포기할 수 없었다. 불변의 원칙이었다.


이 시기에 미국 경제를 압박하고 있는 추가적인 문제는 전쟁 중에 발생된 인플레이션 해결 방안이었다.


전쟁을 치르기 위해 찍어낸 달러는 점차 가치가 하락하는 추세였다. 시중에는 넘치는 달러로 물건 가격이 인상되는 인플레이션이 진행되고 있었다.


인플레이션을 막기 위해 금리를 인상하고 통화량을 축소시키자, 반대로 경제가 위축되었다.



아서 번스  연준 의장 <출처 : 위키피디아>


경기가 나빠지고 실업자가 증가하자 닉슨 대통령(Richard Nixon, 1913~1994, 미국 제37대 대통령)은 측근인 아서 번스(Arthur Frank Burns, 1904~1987)를 연준 위원장에 임명했다.


번스는 닉슨의 대선을 위해 긴축 정책을 완화했고 다시 시중에 통화량을 증가시켰다.  


경제 구조가 바뀌지 않은 이상, 갑자기 좋아질 수 없는 환경이었다. 달러 가치는 더욱더 하락했다.


최종 선택의 시간은 다가오고 있었다.


1971년 8월 ‘닉슨 쇼크’라 불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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