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년대 초 중동에서 석유가 발견된 이래 이 지역 패권은 영국이 가지고 있었다. 석유자본은 영국의 보호령 아래 막대한 이익을 얻고 있었다.
이란의 석유산업
앵글로-이란 석유 회사 <출처 : 위키피디아>
2차 대전 후 이란 정부는 석유 수익 배분의 불합리한 방식에 불만이 많았다. 지속적으로 영국과 협상을 벌였다. 하지만 영국은 움직이지 않았다.
1951년 4월 모하메드 모사데크 수상(Mohammad Mosaddegh, 1882~1967)은 일정액의 보상금을 지불하고 앵글로-이란 석유 회사(Anglo-Iranian Oil Company, 나중에 브리티시 피트롤리엄(British Petroleum Company, 일명 ‘BP’로 사명이 바뀜)를 국유화했다.
모사데크 수상 <출처 : 위키피디아>
당연히 영국의 반발이 강했고, 미국의 협조로 국제사법재판소에 이 안건을 제소했다. 결과적으로 국제사법재판소는 이란의 손을 들어주었다.
하지만 영국과 미국은 이에 굴복하지 않고 아약스 작전(Operation Ajax)으로 이란의 1953년 쿠데타에 성공했다. 모사데크 수상을 몰아내고 군부세력과 함께 팔레비(Mohammad Reza Pahlavi, 1919~1980) 샤를 다시 세웠다.
팔레비(Mohammad Reza Pahlavi) 2대 샤 <출처 : 위키피디아>
팔레비 샤는 1979년 이란 이슬람 혁명(Islamic Revolution)으로 망명하기 전까지 서구화 정책을 폈다.
사우디아라비의 석유 산업
사우디아라비아는 이란과는 다른 길을 걸었다.
1950년 미국과 이익 반분 협정(fifty-fifty agreement, 일명 Golden gimmick)을 맺었다. 미국의 석유 회사 아람코(Aramco)의 판매 수익을 50:50으로 나눈 것이다. 미국으로서는 안정적인 석유 공급이 절실히 필요했기 때문이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석유 수익은 급격히 늘어났다.
당시 미국 경제는 세계 석유 생산량의 30%를 사용하고 있었다. 주요 소비처는 자동차 • 철강 • 정유화학 등 다양한 산업군이었다. 석유를 원료로 사업을 진행했던 것이다.
원유 채굴기 <출처 : 위키피디아>
갑작스러운 사건이 발생했다.
1차 석유파동(1973 oil crisis)
제4차 중동전쟁(Yom Kippur War, The 1973 Arab-Israeli War)의 영향으로 1973년 ‘1차 석유파동(1973 oil crisis)’이 발생되었다.
페르시아의 6개 산유 국가의 제안을 받아들인 석유수출국 기구(OPEC, Organization of the Petroleum Exporting Countries)에서 석유 가격을 기존 배럴당 3달러에서 12달러로 4배나 인상하고 생산량도 제한한 것이다.
제4차 중동전쟁 <출처 : 위키피디아>
이 영향으로 미국의 석유 공급가가 거의 10배 이상 뛰었다. 경제에 엄청난 충격이 왔다.
1973년까지 고속 성장을 하던 경제가 그다음 해 산업생산량이 14%나 하락했다. 두 자리 수의 물가상승이 겹치면서 전형적인 스태그플레이션이 다가왔다.(마이너스 성장 + 물가 인상)
대량 실업과 금리 인상, 자산가치 하락(부동산 가격 폭락)으로 주식 시장도 폭삭 주저앉았다.
이때부터 미국 경제는 산업 체질을 바꿔나갔다. 세금을 줄이고 연방정부 재정을 늘려도 물가와 실업률 상승을 잡기에는 한계가 뚜렷했기 때문이다.
반대로 아랍 국가들은 넘치는 오일달러로 주체할 수 없었다. 자국의 산업에 투자하기에 지리적 여건이 너무 열악했다(국토의 대부분이 사막이다). 국내 기업에 투자하자니 수익률이 너무 낮았다.
석유수출국기구 OPEC(오펙) 공식기 <출처 : 위키피디아>
많은 돈으로 설비도 짓고 외국에서 유능한 경영진도 데려왔다. 하지만 실질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오히려 낭비적인 요소가 더 많았다. 투자 대비 효율성이 떨어졌다.
눈을 돌렸다. 선진국 중에서 영향력이 높은 미국이 눈에 들어왔다.
이때부터 미국 자산에 오일달러의 투자가 시작됐다. 더구나 원유 대금은 오로지 달러로만 결제가 가능하였다. 보관 중인 달러 환율의 손실을 걱정하지 않아도 됐다(하지만 1978년에 달러 가치 하락으로 큰 손실을 입었다)
고유가에 신음하는 세계는 중동의 석유 외에 타 지역(남미, 북해, 동남아시아 등)에서 유전 발굴을 늘려 나갔다. 대체 에너지인 원자력 발전 투자도 늘렸다.
이란 이슬람 혁명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이슬람 혁명과 아프가니스탄 침공
1979년 미국의 지원을 받던 팔레비 왕조가 '이란 이슬람 혁명'으로 권좌에서 쫓겨났다. 호메이니(Ruhollah Khomeini, 1902~1989)가 정치적, 종교적 권력을 잡았다.
이에 더해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스리마일 섬 원자력 발전소 사고(Three Mile Island accident)가 발생했다.
냉각수 시스템에 문제가 생겼다. 10만 명이 놀라 대피하는 소동이 발생했다.
스리마일 섬 원자력 발전소 사고 <출처 : 위키피디아>
이 사건으로 미국 사회는 큰 충격을 받았다. 대체 에너지인 원전의 안전성에 대한 믿음이 깨졌다. 원전 발전에 대한 리스크가 주요 쟁점으로 부각되었다.
결국 70여 개의 원전 발전소 건설 계획을 중단했다. 다시금 석유 수요가 늘어났다.
1979년 12월에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Soviet–Afghan War)이 발생했다.
아프가니스탄 내 친소 정부의 영향력을 키우고자 소련 군대가 아프가니스탄으로 침공해 들어간 것이다. 미국은 공산주의의 확장으로 인식했다.
카터 대통령은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발판 삼아 중동 지역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을 염려했다. 엄중 경고했다(소련은 침공 이후 10여 년간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세력의 게릴라 전에 고전했다)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출처 : 위키피디아>
이러한 혼란스러운 국제 정세 속에서 1978년 ‘제2차 석유 파동(1979 oil crisis)’이 발생되었다.
제2차 석유 파동(1979 oil crisis)
공급의 감소로 인한 1차 파동 때보다는 심리적, 정치적 요소가 더 강했다.
이후 1980년 이란-이라크 전쟁(Iran-Iraq War)으로 원유 가격은 배럴당 39달러 수준까지 올랐다. 석유 파동 전에 비해 2배 이상 오른 것이다.
이 시기에 자동차 회사들도 연비의 중요성을 인식했다. 하지만 시장 점유율은 일본 자동차가 서서히 점령해 나가고 있었다.
중동 지역 이외의 멕시코, 나이지리아, 베네수엘라와 같은 석유 수출국은 생산을 확대했다. 소련은 원유 수출을 크게 늘렸다. 공급의 증가로 원유 가격이 더 이상 상승하지 않았다.
두 차례의 석유 파동을 겪으면서 미국의 산업은 효율성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재편되었다. 에너지 위기 과정을 겪으면서 경쟁력을 키워 나간 것이다.
연방정부는 제조업에서 벗어나 새로운 산업인 금융과 서비스 쪽으로 경제 정책을 바꿔 나갔다. 금융의 중심지는 뉴욕 월스트리트 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