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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정엽 Jun 20. 2020

레이거노믹스와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

미국 경제 역사 이야기 59

제40대 대통령으로 로널드 레이건(Ronald Wilson Reagan)이 당선되었다.


로널드 레이건(Ronald Wilson Reagan) 대통령과 레이거노믹스


그의 대통령 재직 기간은 1981년부터 89년까지 였다.


그 유명한 레이거노믹스(Reaganomics)를 시행했다. 이 단어는 ‘레이건(Reagan)‘과 '이코노믹스(economics)'의 조합어로 그가 재임 기간 추진한 경제 정책을 말한다.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출처 : 위키피디아>


 ‘신자유주의(neoliberalism, neo-liberalism) 경제 정책’을 중심으로 하였다.


대규모 감세를 통한 기업의 투자의욕을 고취시켰다. 연방정부의 지출을 줄여 재정 적자를 축소시켰다. 기업의 자율성을 보장해 주기 위한 행정 규제도 완화했다.


가장 중점을 둔 것은 법인세와 소득세 인하를 통한 투자 활성화였다. 세금으로 납부할 돈을 다시 사업에 재투자하는 방향으로 유도한 것이다.


아울러 루스벨트 대통령 이후 지속되었던 복지정책과 관련된 예산을 대폭 줄였다. 수급 기준도 상향시켜 연방정부의 지출 규모도 줄여 나갔다.



레이건 대통령의 세금 감면 계획  <출처 : 위키피디아>


신자유주의와 시카고학파


이러한 배경에는 '신자유주의(neoliberalism, neo-liberalism)'라 불리는 정책 영향이 컸다.


'신자유주의'는 어떤 것인가?


1929년 대공황 이후 연방정부의 경제 정책 주류는 케인스의 경제학이었다. 유효 수효 이론을 통해 경제 과정을 이해하고 정책 반영에 적용해 나갔다.


1970년 말 이후 스태그플레이션이 시작되면서 케인스의 이론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대표적인 곳이 ‘시카고학파(Chicago School of Economics)’였다. 일명 ‘통화주의자’라고도 불렸다. '경제 활동에서 중요한 것은 화폐의 역할이다. 통화정책 이야말로 핵심적인 경제 정책으로 추진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시카고학파는 현재까지 약 30여 명의 노벨 경제학상을 배출했다. 각국 정부의 주요 경제 자문단으로 활동하고 있다. 영향력이 막강하다.


밀턴 프리드먼(Milton Friedman)   <출처 : 위키피디아>


대표적인 학자로 밀턴 프리드먼(Milton Friedman, 1912~2006)과 조지 스티글러(George Joseph Stigler, 1911~1991)가 있다.


시카고학파의 이론적 배경이 레이거 노믹스의 근간을 이루게 됐다. 케인스의 정책과는 대척점에 섰다.  


신자유주의는 기존의 자유주의와는 차이가 있다. 자유방임주의의 접근법이 다르다.


기존의 자유주의는 경쟁을 기초로 하여 국가의 능력을 억제하고 말 그대로 자유롭게 놔둘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는 스스로 무질서한 시장을 정리하고 윤리적 도덕성을 부여한다고 봤다. 시장이 자발적으로 질서를 잡는다고 여겼다.


경제적인 자유는 스스로 통제권을 갖고 있다고 보았다. 정부의 간섭 없이 그대로 놔두는 것을 우선시하였다. 케인스의 정부 정책 관여와 개입과는 완전히 다른 방향을 가졌다.


이 때문에 자유 시장을 위한 규제 완화, 재산권 존중, 각 국가 간의 규제를 최소하 하는 자유 무역주의를 지향했다.


조지 스티글러(George Joseph Stigler)  <출처 : 위키피디아>


다만 접근 방식에 있어 국가가 스스로 개방 하기보다는, 세계무역기구 (WTO), 세계은행(World Bank), 아시아 개발은행(ADB, Asian Development Bank) 등 다자간 압력을 통한 개방도 가능하다고 보았다.


사실상 무역 시장 개방을 위한 강자의 논리로 보일 수 있는 내용이었다.


'신자유주의'는 영국의 대처 수상(Margaret Thatcher, 1925~2013)과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이 경제 정책에 적용했다. 이후 경제학의 주류로 떠 올랐다.  


쌍둥이 적자와 소련의 붕괴


이러한 배경을 가진 레이거 노믹스의 효과는 시행 초기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석유파동 이후의 석유 공급 확대에 따른 안정화와 퇴직연금(연기금)의 주식 매입이 시작됐다.  주가는 서서히 올라갔다(16개월간 다우지수는 지속적인 성장을 이어갔다).


모든 것이 좋은 것은 아니었다.


감세 정책으로 인한 세수의 감소(재정 적자), 일본 등 새로운 국가의 성장에 따른 무역 불균형(무역 적자)의 두 가지 효과가 적용되었다.


미국 무역수지 변화 <출처 : 위키피디아>



연방정부의 쌍둥이 적자(Twin Deficits)는 오랜 기간 가장 큰 이슈로 남아있게 됐다.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이후 국방비 지출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연방정부의 큰 부담이었다.


재임 초기, 대규모 재무장 계획에 이어 우주 미사일 방어 시스템 구축 계획(일명 스타워즈(Star Wars) 전략)도 추가 되었다.


미국의 재무장 정책에 소련의 군비도 나날이 늘어만 갔다. 경제 규모 대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국방비 지출은 큰 부담이었다. 결국 소련 붕괴의 가장 큰 원인이 되었다.


레이건과 고르바초프  <출처 : 위키피디아>


소련은 1991년 12월 미하일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ev, 1931~ )가 대통령직을 사임하면서 붕괴됐다.


소련 지도부가 해체되면서 보리스 옐친(Boris (Nicolayevich) Yeltsin, 1931~2007)이 러시아의 대통령으로 승계되었다. 이후 15개의 국가로 나누어졌다.


소련이 해체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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