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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정엽 Jun 22. 2020

플라자 합의와  일본의 잃어버린 10년

미국 경제 역사 이야기 61

1991년 1월 제1차 걸프전(The Gulf War)이 발발했다.


1991년의 상황


미국 주도로 모인 34개 국가의 다국적 연합군이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및 합병에 반대한 전쟁이다.


이라크 군은 1990년 8월 쿠웨이트 점령을 시작했다. 미국은 사우디아라비아를 방어하면서 다국적 군을 편성했다. 1991년 1월  '사막의 폭풍 작전'이라 불리는 지상군 투입이 시작되었다. 본격적인 걸프전이 발생했다.


이 전쟁은 2월 말에 끝났다. 쿠웨이트는 해방됐다. 압도적인 연합군의 화력으로 단기간에 전쟁이 종료되었다. 중동에서의 미국이 차지하는 위상은 격상되었고, 주도권을 갖게 되었다.


이 해 9월에 우리나라와 북한이 UN에 동시 가입했다.


일본의 잃어버린 10년(Lost Dacade)


일본에서는 대표적 불황이라 불리는 '잃어버린 10년(Lost Dacade)' 이 시작되는 해였다.


이 불황은 아키히토 일왕이 즉위한 1989년부터 시작되었다 하여 '헤이세이 불황(平成不況)'이라고도 불린다.


단순히 10년에 끝나지 않고 불황 기간이 점점 늘어났다. '잃어버린 20년(The Lost Two Decades, The Lost 20 Years)'이라는 표현도 나왔다.



일본 기준금리의 변동   <출처 : 위키피디아>


최근에는 '잃어버린 30년(The Lost Three Decades, The Lost 30 Years)'이라는 표현으로 조심스레 나왔다. 결국 불황의 장기화에 대한 여러 가지 표현이었다.


잃어버린 10년의 효과는 일본 내에서 엄청난 결과를 가져왔다. 극심한 경제의 장기 침체가 발생했다. 주식 가격 폭락과 부동산 거품 붕괴로 수많은 회사와 은행이 무너졌다. 경제 성장률은 0%대의 수준이 10년 넘게 지속되었다.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미국을 능가할 정도로 거침없던 일본 경제의 발전이 있었다. 하지만 단 한 번의 경제 협약으로 이런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1985년 9월에 체결된 ‘플라자 합의(Plaza Accord, Plaza Agreement)’였다.



플라자 호텔  <출처 : 위키피디아>


1985년 ‘플라자 합의(Plaza Accord, Plaza Agreement)’


이 합의는 일본과 미국만 체결한 것이 아니었다. 프랑스, 독일(당시 서독), 미국, 영국의 재무장관과 중앙은행장이 모요 체결한 것이다.


1985년 9월 뉴욕에 있는 플라자 호텔에서 진행된 회의 발표된 내용이었다. 미국의 쌍둥이 재정 적자를 해소하기 위한 회의였다.


플라자 합의  <출처 : 위키피디아>


배경은 다음과 같다.


레이건 대통령 취임 이후 볼커의 금리 인상 유지(두 자릿수)는 지속되고 있었다. 높은 금리로 인해 전 세계 수많은 투자금이 미국으로 몰려들었다.


달러 가치가 상승되면서 미국 제품 가격 인상과 금리 부담이 발생했다. 외국 제품에 비해 경쟁력을 상실한 미국의 수출력은 크게 하락하였다.


이에 더해 재정 지출이 늘어나면서 결국 쌍둥이 적자(재정적자 + 무역수지 적자)는 커져만 갔다.


스태그플레이션이 잡히자 미국으로서는 고평가 된 달러 가치의 조정이 필요했다(당시 달러 가치는 유럽과 일본의 통화 대비 약 50% 정도 평가절상 된 상태였다).


플라자 협의를 통해 미국의 달러 가치를 내렸다. 일본(엔화)과 독일(마르크화)의 통화 가치를 높였다. 이 정책을 최종 채택했다.



일본 닛산 자동차(1960년대)  <출처 : 위키피디아>


엔화는 다음날 1달러에 235엔에서 215엔으로 20엔이 하락했다. 1년 뒤에는 120엔 대에 거래가 이루어졌다.  거의 절반이나 달러 가치가 하락했다.


반대로 엔화는 가치가 올라 엔고 현상이 발생했다(높아진 엔화 가치가 거품 경제의 시작을 가져왔다)


미국 경제는 달러 가치의 하락으로 제품 가격이 대폭 낮아졌다. 수출 경쟁력이 상승하게 되었다. 많은 나라들이 앞다투어 저렴해진 미국 제품과 서비스를 수입했다.  


하지만 낮아진 달러로 미국 내 수입되는 원재료 가격이 올랐다. 물가가 다시 올랐다. 결국 2년 뒤 다시금 속도 조절에 나섰다.  


지나친 달러 하락을 막고 환율의 안정화를 추진하기로 했다.  5개국(프랑스, 서독, 일본, 캐나다, 영국)과 미국은 1987년 프랑스 파리에서 ‘루브르 협정(Louvre Accord, G6 재무 장관 및 중앙은행 총재 성명서)’ 를 체결했다.


이후 일본의 상황은 말 그대로 부자 나라가 되었다.


잃어버린 10년(Lost Dacade)의 과정


엔고에 의해 상대적으로 일본 경제의 규모는 급속히 확대되었다.


일명 ‘반액 세일’이라고 불리는 미국의 자산을 거침없이 사들였다. 상대적으로 저렴한 제품의 생산은 외국으로 공장을 이전했다. 국내는 고부가가치 상품 생산에 주력했다.


일본 국민들의 급격한 해외여행 붐이 불었다. 부동산 시장으로 자금이 쏟아졌다.


일본 동경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말 그대로 ‘일억총중류(一億總中流)' 시절이었다. 이 말은 종신고용에 의한 고용안정과 국민 90% 이상이 중류층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무리한 지출을 해도 걱정 없다는 의미였다. '소비는 미덕'이란 표현이었다.


엔고를 막고자 무리한 금리 인하를 시행했다. 넘치는 통화량을 가져왔다. 거품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였다.


결국 일본 정부는 이를 정리하고자 금리 인상에 나섰다.


먼저 신규 대출을 억제하고 부동산 규제를 늘렸다. 문제가 발생했다. 금리 인상 추진 과정에서 단기간에 너무 급격히 올려 버린 것이다. 일본 중앙은행은 2.5%에서 6%로 2배 이상 상승시켰다.



일본 중앙은행인 일본은행  <출처 : 위키피디아>


저금리로 부담 없던 이자가 갑자기 폭탄으로 다가왔다.


대출을 갚고자 부동산과 주식을 보유한 사람들이 매각을 시작했다. 1990년을 시작으로 쏟아지는 물량으로 주식시장이 급격하게 하락했다.


추가적으로 부동산 가격이 꺼졌다. 자산의 폭락이 시작됐다.


대다수 일본 국민들은 전례 없는 충격에 소비를 줄여 나갔다.  ‘잃어버린 10년’이 시작되었다.


일본 엔 동전 <출처 : 위키피디아>


'잃어버린 10년'의 원인


시간이 지나 일본의 경기 침체와 불황이 꼭 플라자 합의 때문이었느냐에 대한 논의가 나왔다. 그동안 쌓인 일본 경제의 내부적 문제가 그 시기에 터진 것이라는 의견이 나왔다.  


하지만 유사한 방식의 합의를 체결한 유럽 국가들은 이와 달랐다. 동일한 달러 가치 하락에도 심각한 문제점이 발생하지 않았다.


일본의 경우, 플라자 합의가 경제적 문제가 폭발하기 직전의 기폭제 역할이었다는 의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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