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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정엽 Aug 02. 2020

위스키 반란(Whiskey Rebellion)

해밀턴과 제퍼슨 시대의 주요 사건 4

1791년에 일어난 '위스키 반란(Whiskey Rebellion)'은 위스키에 부과된 세금으로 발생된 농민 봉기 사건이다.


1791~94년까지 이어졌고, 연방 정부군에 의해 진압되어 종료됐다.


위스키 세금의 시대적 배경


위스키 세금 부과의 목적은 해밀턴(Alexander Hamilton, 1755 or 1757~1804, 초대 재무부 장관)의 국채 상환 노력의 일환이었다. 명목상은 세금 증대였다. 이면에는 연방정부의 권한 강화가 숨어 있었다.



위스키 스틸  <출처 : 위키피디아>


1791년 해밀턴은 증류수에 대한 세금 부과를 의회에 요청했고, 승인받았다.


부과 기준에서 문제점이 나타났다. 갤런당 세금을 부과하는 방식은 동일했다. 


하지만 대규모 사업자는 생산량 대비 세금 기준이 정해진 정액제였다. 개인이나 소규모 업체는 생산량에 비례하여 부과하는 방식이었다.


세금 기준의 차이과 농민의 불만 


정해진 세율은 대규모 업자에게는 갤런당 6센트, 개인에게는 9센트가 부과되었다.


당연히 반발이 생겼다.



애팔래치아 산맥  <출처  : 위키피디아>



특히 애팔래치아 서부 지역의 농민 반발이 극심했다.


당시 이 지역은 도로 사정 상 수확한 농산물을 팔기 힘든 지역이었다. 운송 수단은 오직 마차밖에 없었다. 동부에 팔 상품을 싣고 험준한 산맥을 넘기 위해서는 막대한 운송비가 발생됐다. 사실상 배보다 배꼽이 더 컸다.


그렇기에 이 지역 농민들은 호밀, 보리, 옥수수를 발효, 증류시켜 위스키를 만들어 경제 활동에 사용했다.



증류하는 방법(1858년 영국)  <출처 : 위키피디아>


팔고 남은 혼합 곡물을 증류해 위스키로 만들어 내다 팔거나, 돈 대신에 물물교환의 가치 수단으로 사용했다. 이런 현실에 위스키 세가 신설된 것이다.


위스키를 제조하는 사람에게는 세금이 부과되었다. 구입이나 사용한 자에게는 세금 부과나 처벌이 없었다.


결과적으로 농민에게 직접적 타격이 발생된 것이다.



반란군이 사용한 깃발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농민들의 반발과 조직적인 저항


수많은 항의 집회와 성토대회가 열렸다. 주 참여자는 농민들이었다.


이들은 독립전쟁에 참전한 군인 출신도 많았다. 연방정부의 세금이 너무 가혹하다는 의견을 퍼뜨리고 다녔다. 해밀턴이 동부지역 사업자들을 위해 서부 지역에 불공정한 세금을 부과했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납부 거부 운동과 함께 세금을 부과하러 온 공무원을 폭행하거나 희롱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동시에 법적인 탄원을 올려 법률 폐지를 호소했다.

 


세금 공무원을 조롱하는 장면   <출처 : 위키피디아>


연방정부는 세금 징수에 성공하지 못했다. 수많은 개인 증류소를 가진 이들은 납부를 거부했다. 조직적인 저항도 시행했다.


연방정부는 1792년 9월 조사관을 파견, 내용을 파악하고 협상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1793년까지 납부 거부는 지속되었다. 단속이나 세무징수 공무원 집이 불타기도 했다.


앨버트 갤러틴의 노력과 실패


참고로 앨버트 갤러틴(Abraham Alfonse Albert Gallatin, 1761~1849, 제퍼슨, 매디슨 시대의 재무부 장관)은 지역 항의 대중 집회에 서기로 참석했다. 


중재를 위해 노력했다. 실패했다. 세금으로 고통받는 농민의 편에 섰다. 위스키 세금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해밀턴 공격에 앞장서게 됐다.



앨버트 갤러틴  <출처 :위키피디아>


폭동은 점점 더 과격해지고 조직화되었다.


저항은 1794년 절정에 다다랐다. 법원에서 발부한 소환장을 거부했다. 폭동을 주도한 농민 대표는 위스키 세금으로 촉발한 불만을 다른 경제적 분노로 연결시켰다.


세금과 관련 없는 주민들이 폭행당하고, 재산 있는 집을 습격하는 일들이 빈번하게 발생됐다.


폭동 진압에 나서는 연방정부


결국 워싱턴 대통령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연방정부의 법적 권한을 시행했다. 하지만 신중하게 접근했다.  


진압군을 사열하는 워싱턴 대통령 <출처 : 위키피디아>


반란군 대표와의 협상을 위한 대표를 파견했다. 다른 한편, 군사적인 행동을 준비해 원정군을 꾸렸다. 아울러 각 주의 민병대도 모집하여 폭동 진압에 동원시켰다.


1794년 10월 서부 펜실베이니아로 정부군이 진격하면서 반란군이 와해되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반란은 진압되었다. 세금 체계는 유지되었다. 다행히 인명피해는 거의 없었다.


붙잡힌 이들은 재판을 통해 반역죄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일부는 사형을 선고받고, 교수형에 처해질 위기에 놓였다. 이후 워싱턴 대통령에 의해 사면을 받았다.



해밀턴의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위스키 세금의 폭력 사태는 마무리되었으나 농민의 불만은 사라지지 않았다.


위스키 세금 사건의 결과


농민의 편에 적극 동조한 공화파에 의해 정치적 다툼은 계속 이어졌다. 1800년 대통령 선거에서 제퍼슨이 이겼고, 정권이 교체됐다. 제퍼슨 취임 1년 뒤인 1802년 위스키 세금은 폐지되었다.


동시에 국내에 부과된 대부분의 세금도 폐지하여, '1812년 미국-영국(War of 1812)' 전쟁 전까지 오직 관세 수입에만 의존하게 됐다.



1812년 미국-영국 전쟁 중 이리호 전투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재무장관 시절에 발생된 해밀턴의 뼈아픈 정책 실패였다. 그는 이 사건으로 엄청난 스트레스를 겪었고, 부인은 유산을 했다.


해밀턴은 이다음 해인 1795년 1월, 재무부 장관직을 사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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