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안에선 대체로 책을 읽는 편이다. 갈수록 고장 나는 눈이라 오랫동안 들고있지는 못한다. 물 한 모금 마시고 하늘 한번 쳐다보는 닭대가리 모양 책 한 페이지 읽고 차창 한번 쳐다보고, 책을 읽다가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곤 한다. 김포공항을 지나 계양역, 검암역을 향해가는 열차가 긴 터널을 빠져나오면 초록의 고장이다(가와바타 야스나리의『설국』첫 문장을 슬쩍 버무려봤다). 사위가 푸른 철길을 열차가 내달리면 주마등처럼 지나가는 철로 주변 논, 밭과 숲, 멀리 보이는 계양산 꼭대기 첨탑이 내 눈을 쫓아 숨 가쁘게 따라온다. 희한한 것은 내가 읽고 있는 책 내용에 따라 바깥 풍경이 주는 느낌이나 분위기가 다르다는 거다. 가령 애정 소설이라도 읽다 차창 밖을 보면, 숲은 책 속 남녀 주인공들이 만나고 사랑했을 따뜻한 삽화로 그려지고 반면에 추리소설이 배경이라면 숲은 섬뜩하고 깊은 어둠의 심연으로 다가온다(이런 내 기분에 심리학 전문가인 지인이 부분적이긴 하지만 '정서의 정보 모델'이라는 이론을 제시했다. 사람은 정서를 하나의 정보처럼 사용해 특정한 상황이나 사람에 대해 판단을 내린다는 것이다). 사소한 감정들이 만들어낸 자연의 표정들이다.
지옥에서 보낸 한철 같은 여름의 잔영이 9월에야 물러가는가 싶더니 뒤늦게 온 탓에 빠르게 자취를 감추려는 가을이다. 흥얼거리던 「10월의 어느 멋진 날」도 후딱 지나가버렸고, 겨우 제철 기분을 내려 열심히 밖을 쏘다니지만, 때이른 한기에 몸을 움츠리게 된다. 내 의지와 계절의 정서와는 상관없이 또 한해가 지워져 간다.
잘 놀아야 성공한다는 '휴테크'를 주장하는 괴짜 문화심리학자 김정운은 삶은 ‘단언(斷言)적’이어야 불안하지 않다고 했다. 문학이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이유가 바로 이 같은 단언적(또는 단정적) 표현 때문이라고. 책을 읽다 밑줄을 긋게 되는 문장들이 대부분 그렇다. 살아가는 무게에 눌린 나 같은 범인들은 생각할 수도 없는 통찰적 선언을 작가들은 거리낌 없이 글로 내 던진다. 주저하지 않는 삶에서 나오는 확고하고 날카로운 말들. 별것 아닌 것 같은데도 읽는 순간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거나 격하게 공감하게 되는 금언 같은 문장들 말이다. 가을을 보며 느끼는 감정을 표현하는 것 또한 충분히 단언적이라 할 수 있다. '가을은 천고마비의 계절이다'와 같은 밋밋한 단언보다는 '가을에는 일기예보를 듣지 않아도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라든가 '가을에는 흔들리는 마음의 출처를 찾아 헤매게 된다.'와 같은 약간 오글거리면서도 가슴을 환장하게 만드는 단언들이 잘 어울린다. 반대로 이성적으로 접근한다면 가을은 현실적일 수 밖 없다. 사유, 사색하는 계절이 아닌 인식하는 계절이 돼버린다. '가을은 김장무우를 심기에 가장 적합하다' 또는 '가을엔 수험생들의 건강관리가 중요하다'와 같은 서민들의 심정을 헤아리는 단언이라고나 할까. 그만큼 가을은 날씨가 아닌 와 닿는 질감으로 맞이해야 할 계절 아니겠는가. 어쨌든 각자 방식대로 즐기고 고민하면 될 일이지만, 자연스러운 감정이입이든 이성적이든 분명 가을이 보내기 쉬운 계절은 아닌 듯싶다.
훌쩍 떠났으면 하는 마음이다. 가을이라는 이유와 무관하지 않다. 계절의 원색이 탈색되고 뭉개져 버리기 전, 자연은 간절하게 유혹한다. 목적지를 정하지 않은 채 그저 궤도를 이탈해 튕겨 나가도록 몸을 놔두고 싶다. 출발이 좋으면 그만이다. 어쩌면 닿은 곳은 내가 정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떠날까 말까를 결정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것 자체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그런 욕구가 생겼다는 건 이미 마음은 콩밭이라는 얘길 텐데. 오히려 어떻게 떠날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다시 제자리로 올 것인가를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뭐.. 그냥. 산이 좋으니까 가는 거지. 산에 가면 온몸의 막힌 혈이 확 뚫리잖아.”
얼마 전 동기들 모임 때 가을 여행은 뭐니 뭐니 해도 만추의 산이라고 이구동성으로 침을 튀기다가 사시사철 제 집 드나들 듯 산을 기어오르는 친구 녀석에게 묻자 나온 답이었다. 공대 출신 아니랄까 봐 표현력이 푸짐하게 빈약했다. “아니... 야, 너는 그것밖에 표현이 안 되냐? 니가 뭔 한의사도 아니고 혈은 무슨..., 인마! 산을 그렇게 헤집고 다녔으면 좀 더 근사한 말이 있을 거 아녀. 필(feel)이 팍팍 오는 거.” 잠시 생각하던 녀석이 말했다. “그래? 그럼 다시 물어봐.” 어이없는 투로 재차 묻자, 녀석의 대답은 이렇게 메아리로 돌아왔다. “산이 거기 있으니까.” 헐~ 조지 말로리의 그 전설적인 단언을 들이밀 줄이야. “그럼, 집으로 돌아가는 건 거기에 집이 있어서고?” 내가 웃으며 반문하자 녀석은 진중하게 답변을 내놓는다. “당연하지. 제자리로 돌아가야지.” “................” 반박할 수 없는 대답이었지만 무슨 선문답이라도 주고받은 것 같아 더는 대화를 이어가지 못하고 마른안주로 나온 오징어포만 말없이 씹었다.
거기에 가을이 있기 때문에 나도 북악산에 올랐다고 단언해야 할 것 같다. 봄이었으면 황사에 캑캑거리며 오르다 잿빛 하늘만 봤을 테고, 여름 산이었다면 경치고 나발이고 흘린 땀을 연신 닦아내면서 투덜거리고 올랐거나 아예 오를 엄두를 내지 않았을 것이며, 겨울이라면 설산의 운치는 볼 수 있겠지만 오싹한 추위에 올바른 산의 정취를 즐기기 힘들었을 거라고. 결국 어느 계절도 가을의 아우라를 넘지 못했기 때문에 가을 산을 찾은 것뿐이라고. 시퍼런 하늘을 바라보니 저절로 머리가 비워지게 되는 것이라고 말이다. 사색한다는 것은 뭔가 새로운 것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것, 알고 있는 것들을 이치에 맞게 재정리하는 시간이 아닐까. 풍성함과 함께 소멸해 가는 한해의 마지막 계절을 맞이하기 전, 더는 가지려는 욕심이 아니라 내려놓고 보내려는 마음을 갖게 하는. 이 산의 나무들도 세 계절을 빌려 입었던 고운 자태를 내려놓고 다시 비어진 모습으로 돌아갈 때가 온 것이다. 그래서일까. 벗어놓은 낙엽을 긁어모아 태우는 냄새에는 잘 정돈된 자연의 개운함이 배어있고, 삭아가는 계절이 깨끗하게 화장(火葬)되는 느낌이 든다.
사색에 잠겨 천천히 산길을 오르는 그때, 등산복을 멋지게 차려입은 여성이 홀로 내 옆을 스쳐 간다. 경쾌한 발걸음이었다. 덩달아 내 걸음도 빨라진다. 이성적 호기심이 발동해서 그런 것이 절대 아니다. 이왕 같은 산을, 같은 코스로 가고 있으니, 말동무라도 될 수 있을까 해서 그러는 거다. "가을이 참 빌어먹을 계절 같습니다. 이렇게 마음을 요동치게 하니까요." 옆에 서서 한 호흡 빨라진 어조로 유치뽕짝하게 말을 걸자, 작업남이라도 만났다고 생각했는지 여성은 관심도 없는 듯 무심히 걸어간다. "그냥 보내기엔 만만치 않은 계절인 것 같지요?" 내가 계속 주절거리자, 나를 쳐다보는 여성의 세련되고 고운 얼굴이 웃는 순간 잠시 아찔해진다. 가다가 같은 곳에서 쉬어간다면 본격적으로 말을 붙여 보는 것으로 동행(?)을 시작할 수 있으리라. 벌써 저만치 앞서가는 여성을 부지런히 쫓아가지만 좀처럼 간격이 좁혀지지 않는다. "저..., 저기요..잠깐..." 초조한 마음에 얘기를 꺼내려는 순간, 뒤돌아보며 엷은 미소를 지어 보인 여성은 휑하니 바람처럼 사라진다. 방금 상황이 꿈인 듯 아득하다. 지나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나는 산길에 우두커니 혼자 서있다. 내가 본 것이 실체인지 허상인지 헷갈린다. 어떤 격정에 쉽싸여 잠시 환상을 봤는지도 모른다. 하긴 상상이었든 겪은 일이든 아무렴 어떻겠는가. 나비의 꿈을 꾼 후 장자도 그러지 않았던가. "꿈이 현실인가, 현실이 꿈인가? 그러나, 그런 일은 아무래도 좋다"라고. 나는 잠시 마른 웃음을 흘리다 다시 발걸음을 내디디며 사라진 여성에게 마저 하지 못한 말을 아쉬운 듯 중얼거렸다. 내 마음이 그러는 게 아니라고, 이 가을 때문이라고. 쉽지 않은 계절 탓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