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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용팔 Dec 25. 2020

내 몸은 병들의 내무반

회사 건강검진 결과지를 받아들고 특별한 이상은 없구나라고 페이지를 넘기다 눈에 팍 들어온 뭔가에 꽂힌다. 저기 저..저... 뭐야 저거!  

“비활동성 폐결핵.’”

폐결핵이라니.. 내가? 비활동성은 또 뭐고? 활동을 안 해서 폐결핵에 걸린 거란 말이야?

말도 안 돼! 흥분된 손으로 키보드를 두드린다. 비. 활. 동. 성. 폐. 결. 핵

무수히 흘러내리는 검색 자료를 보고 심상치 않음을 직감한다. 급한 마음에 아무 기사나 클릭해 눈동자를 빠르게 움직인다. “폐결핵이란 결핵균이 폐에 일으키는 병으로 결핵균은 다른 병원균과는 달리 어쩌고 저쩌고...” 그래서 어떻다는 거야. 초조해진다. “...이러한 특성들로 활동이 왕성한 세균성 폐렴이 보통 2~4주 정도면 완치 되며....“ 아이씨~ 그래서 비활동성 폐결핵이 뭐냐고 대체! 짜증이 밀려와 다 건너뛰고 마지막에 큼지막하게 박혀있는 문장을 읽는다. “비활동성 폐결핵이란 자신도 모르게 결핵을 앓고 지나간 경우를 말한다.” 헉! 나도 모르게 병이 내 몸에서 지나가? 무슨 이런 서정적인 병이 다 있어? 내 몸은 내가 다 아는데 바람처럼 스치고 지나가다니...영혼이 한번 빠져나갔다 들어온 느낌이다.

문득 앓고 지나간 병들을 떠올린다. 얼마 전 허리 때문에 고생했지만 그전에는 특별히 몸이 고생한 적이 없었는데... 작년에는 몇 달 동안 계속되는 기침과 가래, 숨이 차올라 병원에서 여러 번 검사를 했지만 딱히 병명이 나오지 않았다가 결국 역류성식도염으로 자의반, 타의반으로 최종 판정을 내렸다. 문제는 비활동성 폐결핵에도 같은 증상이 나타난다고 한다. 그럼 혹시 그게....


나는 예전부터 앓고 있는 지병을 갖고 있다. 정확한 병명은 ‘심장승모판일탈증’ 이라고 하는데 일종의 심장병이다. 심장에 있는 승모판이 안 닫혀 피가 샌다고 하는 병으로 처음 진단받았을 때 충격을 받고 멍한 얼굴로 “그러면 새는 피는 다 어디로 갔나요? 선생님.”라고 묻는 나를 황당한 듯 쳐다 보던 의사 표정이 기억난다. 이 병의 증상은 별로 없다. 가끔 심장이 두근 거리거나 아주 잠깐씩 숨이 차 오른다. 평상시 생활에는 아무 지장도 주지 않는다. 다만 자연 치유가 불가능해 누군가가 그 열린 뚜껑을 닫아줘야 한다고 하니 언젠간 내 몸에 메스를 대야 한다. 사실 이 증상 때문에 다른 병들은 의심하지 않았다. 기침과 가래는 감기 때문이요 숨이 차오름은 심장병 때문이었으리라는 자가 진단을 내렸고 시간이 지나면서 증상이 호전돼 더 이상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활동성 폐결핵이라는 병명을 받아들자 뭔가 과거 히스토리가 만들어진다.


내 안에서 일어난 ‘병들의 전쟁’ 시나리오는 이러 했을 것이다. 몸 안에 있는 내무반 최고참은 심장병이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던 차에 새로운 고참이 내무반으로 전입해 온다. 그 이름은 역류성식도염. 둘의 암투가 시작되고 동시에 경쟁하듯 비슷한 증상으로 나를 사정없이 공격한다. 기침, 가래, 숨 막힘 등등으로... 그러던 어느 날 폐결핵이라는 또 다른 전입자가 들어왔다. 심장병과 역류성식도염은 싸움을 잠시 중단하고 새로운 전입자를 내쫓고자 협력한다. 이렇게 해서 폐결핵은 힘 한번 제대로 못 써보고 나도 모르게 조용히 사라져간 것이리라. 쪽팔리게 폐결핵이란 본래 이름도 상실하고 ‘비활동성 폐결핵’이란 겨우 얻은 아류작의 병명으로…

결국 비활동이란 내가 활동을 안 한게 아니라 내 안에 들어온 결핵균이 못한 활동을 말하는 것이다. 앞으로 병명 앞에 이상한 수식어가 딸려있으면 그 주체를 정확히 따져봐야 하겠다. 그렇게 폐결핵을 쫓아낸 후 둘 싸움은 다시 시작되고 굴러 들어온 돌인 역류성 식도염은 박힌 돌인 심장병을 끝내 빼내지 못하고 굴복한다. 이렇게 해서 내 몸에는 평화가 찾아오고 더 막강해진 심장병의 권력은 영원히 내 몸 내무반 주인이 된다는 해피 엔딩이... 아니 그냥 마무리된다.


건강에 대한 관심이 갈수록 한 여름의 유장한 해만큼 길어지고 있다. 시간들이 지닌 가치를 생각하니 더욱 그렇다. 매년 건강검진 결과를 받을 때 마다 늘어나는 소견 들을 보면서 존재하는 것만으로 완전했던 시절이 이제는 존재해야 할 이유를 하나씩 묻고 있는 것 같은 현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을 문득 깨닫는다. 건강이 그 척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암튼 이제 웬만한 병은 더 이상 내 몸에 침투할 엄두를 내지 못하리라. 심장병이란 든든한(?) 후원병이 항상 나를 지켜주고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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