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무반의 고참병들

by 용팔

회사 건강검진 결과지를 받아 들고 꼼꼼히 살펴본다. 나이가 드니 여기저기 고장 신호가 잡히고 체력도 예전 같지 않아 검사 수치가 정상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민감해진다. 다행히 특별한 이상은 없는 것 같아 덮으려 하는 순간 눈에 들어온 마지막 용어 하나에 멈칫 한다. 이게 뭐야? 비활동성 폐결핵.

폐결핵이라니…, 내가? 비활동성은 또 뭐고? 활동을 안 해서 폐결핵에 걸린 거란 말이야? 무슨 말도 안 되는 시츄에이션이야. 흥분해서 키보드를 두드린다. 비. 활. 동. 성. 폐. 결. 핵

무수히 흘러내리는 관련 검색 자료를 보고 심상치 않음을 직감한다. 아무 기사나 클릭한다. 글줄을 쫓는 눈동자가 분주해진다. ‘폐결핵이란 결핵균이 폐에 일으키는 병으로 결핵균은 다른 병원균과는 달리….’ 병명 소개만 잔뜩 늘어놓는다. 결론이 어떻다는 거야? 초조해진다. ‘…이러한 특성들로 활동이 왕성한 세균성 폐렴이 보통 2~4주 정도 지속되는데….’ 에이 씨! 그래서 비활동성 폐결핵에 걸리면 대체 어떻게 되는 거냐고! 짜증이 밀려와 다른 기사를 클릭해 읽어 내려가다 진하게 박혀있는 한 문장에 꽂힌다. ‘비활동성 폐결핵이란 불현성 감염으로 자신도 모르게 결핵을 앓고 지나간 경우를 말한다.’ 헉! 나도 모르게 병이 몸에서 지나가? 내 몸은 내가 다 아는데 그냥 살짝 즈벼밟고 사라져 버린 병이라니. 무슨 이런 서정적인 병이 다 있어? 혼이 한번 빠져나갔다 들어온 느낌이다. 문득 앓고 지나간 병들을 떠올린다. 얼마 전 허리 때문에 고생했을 뿐, 그 외에는 다른 이상 징후는 없었다. 몇 달 동안 계속되는 기침과 가래, 숨이 차올랐지만, 정기적으로 가는 병원에서도 딱히 이상이 나오지 않았다. 결국 다른 병과로 가서야 역류성식도염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문제는 비활동성 폐결핵에도 같은 증상이 나타난다고 한다. 그럼 혹시 그게….


나는 갖고 있는 지병이 있다. 의사의 소견서에는 ‘심장승모판일탈증’ 이라는 전문 의학 용어가 적혀 있지만 환자에겐 그냥 심장병이다. “이거 보이시죠? 이 막이 이렇게 찢어져서 안 닫히니까 피가 새는 겁니다.” 의사가 가리키는 초음파 영상 속 내 심장엔 한눈에 봐도 너덜너덜해진 뭔가가 학교 운동장에 걸린 태극기 날리듯 펄럭이고 있었다. 가슴에 손을 얹고 국기에 대한 맹세라도 해야 하는가 싶었다. “아니… 피…가 샌다면…, 그러면 새는 피는 다 어디로 갔나요 선생님?” 덤덤하게 하는 질문에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황당해하는 의사 표정이 떠오른다. 이 병이 희한한 건 몸의 엔진에 커다란 이상이 생겼음에도 증상은 그다지 심각하지 않다는 거다. 가끔 심장이 두근거리거나 잠깐씩 숨이 차오르는 정도다. 평상시 생활에 큰 지장도 주지 않는다. 다만 자연 치유가 불가능해서 시간이 갈수록 점점 심각해질 수 있다는 진단이다. 그렇기에 그 열린 뚜껑을 닫아줘야 한다고 하니 바깥 땜질이 아닌 이상 언젠가는 속을 열어 너풀거리는 막에다 오버로크라도 쳐야 한다는 얘기다. 사실 이 증상 때문에 다른 병들은 의심하지 않았다. 기침과 가래는 감기 때문이요 숨이 찬 건 심장병 때문이었으리라는 자가 진단을 내렸고, 증상도 늘 그러니 더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다 활동성 폐결핵이라는 병명을 듣고 나서야 뭔가 히스토리가 만들어졌음을 깨닫는다.


내 안에서 일어난 ‘병들의 전쟁’ 시나리오는 이러했을 것이다. 몸 안 내무반 최고참은 심장병이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던 차에 새로운 고참이 전입해 온다. 이름하여 역류성식도염이다. 둘의 암투가 시작되고 동시에 경쟁하듯 비슷한 증상으로 나를 사정없이 공격한다. 기침, 가래, 숨 막힘 등등으로 자기 영역을 확장한다. 그러던 차에 폐결핵이라는 또 다른 전입자가 들어왔다. 심장병과 역류성식도염은 싸움을 잠시 중단하고 새로운 전입자를 내쫓고자 협공한다. 정신없이 처맞던 폐결핵은 힘 한번 제대로 못 써보고 내 이름처럼 조용히 사라져간 것이리라. 게다가 폐결핵이란 정통성의 이름도 가져보지 못하고 쪽팔리게 ‘비활동성 폐결핵’이란 겨우 얻은 아류작의 병명으로 말이다. 결국 비활동이란 내가 활동을 안 한 게 아니라 들어온 결핵균이 다른 병들에 얻어터져 활동을 못 했다는 게 아닐까 싶다. 그렇게 폐결핵을 쫓아낸 후 둘 싸움은 다시 시작되고 굴러들어 온 역류성식도염도 박힌 심장병을 끝내 빼내지 못하고 굴복한다. 이렇게 해서 내 몸에는 평화가 찾아오고 더 막강해진 심장병의 권력은 영원히 내 몸 내무반 주인이 된다는 해피 엔딩으로… 아니 그냥 마무리된다.


가벼운 증상이라도 몸에 고장 신호가 잡히면 갈수록 예민해진다. 남은 시간이 지닌 가치를 생각하니 더욱 그렇다. 건강검진 결과를 받을 때마다 늘어나는 소견들을 보면서 건강하게 숨 쉬는 것 자체가 존재 이유였던 시절이 이제는 존재해야 할 이유를 하나씩 묻고 있는 것 같은 현실에 서글퍼지면서도 필연일 수밖에 없음을 깨닫는다. 낡아가는 몸이라도 제대로 관리해야 존재하는 구실을 찾을 수 있지 아닐까. 이제 웬만한 병은 더 이상 내 몸에 침투할 엄두를 내지 못할 것이니 한편으론 두 발 뻗고 잘 수 있다는 안도감에 편안해진다. 심장병이란 든든한(?) 내무반 최고참 병이 항상 나를 지켜주고 있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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