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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용팔 Nov 09. 2020

중년(重年)의 중년(中年)

공평하지 않다. 분명 가운데에 서 있는데도 바라보는 시선은 한쪽으로 기운다. 문제는 그 한쪽이 썩 내키지 않는 쪽이라는거다. 그렇다고 내가 시선을 쫓아 옮길 수도 없다. 일찍이 철학자 질 들뢰즈는 ‘어떤 것의 가운데에 있다고 해서 모든 것의 중심이 될 수 없다'고 했다. 그래 이 양반 말 한번 잘했다. 누가 중심에 있고 싶어서 거기에 있는 것도 아니다. 가다 보니 중간에 머물게 됐다. 물릴 수 있다면 되돌리고 싶지만 불가능하니 답답할 노릇이다. 이제껏 살아오면서 가운데에 머물러 본 지가 있었는지 가물가물하다. 어릴 적 공부보다 더 싫었던 게 머리 깎는 일이었다. 왜 그랬는지는 생각나지 않는다. 그 나이에 ‘신체 발부 수지부모’를 외쳤을 리는 없을 테고 아마도 이발소에 우글거리는 남자들이 뿜어내는 칙칙한 분위기가 싫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갑자기 머리를 깎지 않으면 안 되는 시기가 내 앞에 들이닥쳤다. 학교에 갈 수가 없었다. 중(中)학교 때 일이었고 내가 첫 번째로 맞이한 가운데 시절이었다. 어린아이의 사랑스러움은 사라지고 고등학생의 팔팔함은 아직 느껴지지 않았던 중간 어디쯤의 위치에서 3년을 보냈다. 그리고 몇십  년이 지난 오늘 또 다른 중간으로 살아가고 있다. 중(中)년이란 이름으로.


중년이란 마흔 살 안팎의 나이. 청년과 노년 중간을 이른다.. 때로 나처럼 50대까지 포함하는 경우도 있다며 선심 쓰듯 끼워 넣는다. 중년 한 단계 밑인 장년(壯年)이라 부르는 나이는 40대를 말하는데 100세 시대를 살면서 길어진 수명을 의미하는 또 다른 장년(長年)이 중년 이후 훅 치고 들어와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됐다. 결론적으로 장년과 장년 사이에 낀 세대가 중년이다. 사전적 의미로 풀면 ‘사람의 일생 중에서, 한창 기운이 왕성하고 활발한 나이도 아니고, 오래 산 것도 아닌 이도저도 아닌 사람’이란 해석이 나온다. 어‘중간’한 세대라는 걸 에둘러 표현하면 그렇다는 얘기다. 게다가 장년과 엇비슷한 세대라도 중장(中壯)년도 아닌 중장(中長)년에 슬쩍 갖다 붙인다. 이 얼마나 불공평한 자기들만의 해석인가. 단물이 다 빨렸으니 앞장(壯)에 붙어있지 말고 뒷장(長)에 붙어 조용히 나잇값이나 하고 살라는 얘긴가.  

그렇다고 현장에서 물러나는 것도, 은퇴도 마음대로 허락하지 않는다. 밖에서는 중년의 언어들ㅡ건강, 경제, 자녀 결혼 같은 현실적인 문제ㅡ을 어학 반복 학습처럼 매일 리와인드 하며 살아야 하고, 집에서는 쉬면서 삶을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집안 정리를 잘해놔야 아내한테 제대로 대접받는다. 입맛이 관대해져 식탁에 올라온 반찬 맛에 칭찬해야 하고 끼니때마다 오르는 제철 음식에 고마움ㅡ주는 대로 군말 없이 먹어야 하는데 이 얼마나 황송 한가ㅡ도 잊지 말아야 한다. 밖에서나 집에서나 생존(?)을 위해 기꺼이 분위기에 편승한다. 때로는 적극적인 동조로, 때로는 귀가 흐뭇해하는 말(절대 ‘아부’는 아니라고 주장하지만)로. 저물어가고 있다는 걸 인정해야 하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다른 ‘세대’가 아닌 ‘세계’에 살다 넘어 온 기분이 든다.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어떤 별에서 잠시 머문 것뿐인데 돌아와 보니 수십 년이 흘러가 있는. 정말 그런 삶을 살지 않았나 하는... 그래서 중년이 된 지금 그 얽히고설킨 시간의 흔적을 땅 파듯 다 긁어내 다시 제대로 쌓아가며 토닥토닥 밟아주고 싶은 심정이다.    

학창 시절의 중간이 단순히 육체적 위해가 가해지려는 데 대한 본능적 거부반응이었다면 지금의 중간은 어긋난ㅡ어쩌면 조금은 방기했을ㅡ삶에 이성적으로 반응하는 깊은 순응이다.     


사카이 준코의 <저도 중년은 처음입니다>란 책에 이런 말이 나온다.

“자꾸만 중년 여성이라고 말씀하시는데 결국은 아줌마 아닌가요? 아줌마와 중년 여성, 뭐가 다른 거죠?” 중년은 나이를 나타내는 말이고, 아줌마란 마음가짐을 나타내는 말이라 여긴다고. 그래서 나도 마음가짐부터 바꿨다. 외모는 극명하게 구분되기 때문에 아무래도 덜 티가 나는 내적인 변화 즉, 50대 감수성으로 20대를 살고자 하는데...  

아내는 이걸 ‘주책’이라고 불렀다. 그냥 50대 심장으로 살아가는 게 어울리는 중년이라는 거다. 90년대 초 활동했던 <이오공감>이란 그룹이 생각난다. 음악성도 훌륭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이름도 대단히 프로그레시브 했다. 30여 년 전에 20대에서 50대의 초상에 대한 변화와 가치를 정의하려고 했다니. 20대의 질풍노도와 굳어져 가는 50대의 삶이 어떤 공감대를 이룰 수 있을까. 왜 3,40대는 아니었을까를 잠시 생각하다 이런 결론에 이른다. 당시엔 3,40대가 낀(中)세대였고 여전히 진행 중인 나이였을 테니 그들을 소환하기엔 너무 급한 삶을 살고 있기 때문 아니었을까.  

“나는 중년이긴 해도 아줌마는 아냐, 나는 중년이긴 해도 꼰대 아저씨는 아니야”라는 외모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시기가 중년이다. 그건 쉼 없이 달리느라 돌보지 못했던 자신에게 하루라도, 하나라도 더 보태줘 풍요하게 보이도록 하려는 일종의 자기보상 심리작용 때문일지 모른다. 찢기고 닳은 육신에 대하여, 그리고 상처받고 잃어버린 영혼에 대하여. 다만 그런 집착이 중년의 삶을 소모적으로 흔들고 결국 추하게 늙어가도록 만들 수 있다. 일시적 만족이 전체를 아우르지는 못한다. 조금씩 스며들도록 천천히 들여다봐야 한다.     


사진이 뺄셈의 미학이라는 것처럼 짓눌러지고 버겁게 느껴졌던 짊을 하나둘 내려놓고 필요 없는 부분을 깎아 내 아름다운 나이를 만드는 것, 이제는 정말 치열하지 않고 부서지지 않는 생의 한가운데 서서 스스로 말미암아 자유로운 중년으로 살아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삶은 때로 무엇을 숨겨놓고 가는지 알 수 없는 늪과 같다.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점일 것이다. 중년의 나이란 이 느닷없는 삶의 반전에 대책 없음, 그것을 수락하지 않을 수 없음을 의미한다.”             

  - 신수정. 김훈의 <강산무진>에 대한 해설 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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