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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용팔 Dec 27. 2020

<러빙 빈센트>, 바라 볼 순 있지만 이해할 수 없는

“캔버스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도 무한하게 비어있는 여백,

우리를 낙심케 하며 가슴을 찢어놓을 듯

텅 빈 여백을 우리 앞으로 돌려놓는다.

그것도 영원히!"


톨스토이는 영혼은 유리병과 같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육체 안에는 투명한 유리병과 빛나는 불꽃이 모두 들어있다고요.

그 영혼의 유리병은 당신에게 순수함과 불꽃같은 열정을 주었지만 예술이라는 고된 삶은 육신과 영혼을 서서히 소진시켜 버렸습니다. 예술적 이상과 세속적인 현실의 괴리에 신음하고, 끝없이 갈마드는 진실된 사랑과 광기의 집착에서 벗어나는 길은 결국 더불어 살아가는 것들, 그 모든 삶과 격절하는 선택이었습니다.  

때문에 갑작스러운 죽음은 연민할 아량조차 갖지 못한 체 맞이하게 됩니다.

아쉬움에 체화된 그림의 언어가 주문을 외우듯 떠도는 영혼을 스크린으로 불러냅니다.  


 “광기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아주 가까이 바라보면서,

광기에 대한 두려움이 많이 사라지고 있다.

어쩌면 나 역시 가까운 미래에 그런 병에 걸리게 될지 모르지.

전에는 그런 사람들을 보면 혐오감을 느끼곤 했다.

게다가 많은 화가들이 그런 식으로 끝났다는 사실을 생각하는 건

너무 고통스러운 일이다. “


삶 속의 이미지들은 당신의 손끝에 묻힌 물감으로 차곡차곡 쌓여 남아 있습니다.

치유되지 않는 상처에서 태동한 작품들은 “묘사된 들판은 실제의 들판보다 푸르러야 한다”라고 했던

페루난두 페소아의 말처럼 작품 속 현실이 육안으로 목격한 그것보다 생생하게 만져지고 느껴지는 듯합니다.

 

“화가는 자신의 그림을 통해서만 말할 수 있다.”


카메라 앵글 안에 담긴 정겨운 장소들, 눈부신 색체는 경이로웠습니다. 끊임없이 화면에 꿈틀거리는 빛과 색의 향연은 끊어지지 않고 연속되는 생각과 의식처럼 머릿속을 헤집고 다닙니다.

그림 속 풍경 한 점 한 점이 미장센이 되고, 인물 한 사람 한 사람이 조연이고 등장인물이 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미지들이 살아있는 공간과 속을 배회하는 인물들을 보는 것은 작품(그림) 속의 작품(영화)을 감상하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듭니다.

판타지인 동시에 판타지가 재현하는 당신의 현실 속으로 들어가 이야기를 듣습니다.

 

당신에게 별은 꾸는 꿈이자 맞닥뜨리는 현실입니다


영화의 시작은 <별이 빛나는 밤>이고 <론강의 별이 빛나는 밤>이 앤딩입니다.

그림만큼 사랑하고, 영화의 ost로 쓰였던 <빈센트>의 첫 가사도 ‘Starry, starry night’로 시작하지요.

별은 꿈이다라는 소싯적부터 들어온 탓에 식상되고, 다소 유치하게 들릴 수는 이 추상성은 당신에게 그림이라는 구체성을 부여합니다. 그림으로 꿈을 그리고 그 꿈은 그림으로 완성해 나가는..

꿈이면서 영원한 것에 대한 동경. 한편으로는 가셰박사의 말처럼 그 별에는 깊은 외로움이 둘러싸여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별을 볼 때면

언제나 꿈을 꾸게 돼.  

왜 우린 창공의 불꽃에 접근할 수 없을까?

혹시 죽음이 우리를 별로 데려가는 걸까?

늙어서 편안히 죽으면 저기까지 걸아서 가게 되는 걸까?"


꿈의 완성을 위해 기다릴 수는 없었을까요? 아니면 그 꿈을 위해 선택의 순간을 앞당긴 것뿐인가요?

그 위로 힘든, 버티는, 좌절이란 감정들이 꿈, 그림, 사랑 같은 희망들을 집어삼켜 버렸나요?


“어쩌면 이게 모두를 위한 일이야”


그래서 그 선택은 꿈의 완성인가요, 아니면 어딘가에서 여전히 진행 중인 것일까요?

현실과 이상이라는 서로 포개질 수 없는 간극만 확인한 채, 사는 것도 그렇다고 영원한 이별도 원하지 않는 타협의 방식인지요.


“화가의 삶에서

죽음은 아마 별 것 아닐지도 몰라.

물론 나야 아직 아무것도 알 수 없지만.... “


바라보는 두 시선의 차이는 당신을 어떻게 정의할까요?


사실 당신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조심스럽습니다. 신화 같은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을 테니까요. 화가 반 고흐의 그림들과 비운의 생애는 회화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게조차 언제나 흥밋거리였지요. 자신의 귀를 자른 예술가, 후원자이자 정신적 지주였던 동생 테오와의 우애, 그리고 그림마다 담겨 있는 정열과 광기의 이야기들. 그럼에도 당신을 정확히 이해하는 건 쉽지 않습니다.

영화 끝 우체부 룰랭은 아들 아루망과 밤하늘의 별을 보고 이렇게 말합니다.

“저기 좀 봐라. 다른 세상이 펼쳐져 있구나. 바라볼 순 있지만 이해할 수 없는...”

마치 당신을 보고 얘기하듯이.

그렇듯 늘 우리가 윤이 나도록 매만지는 당신의 역사가 책과 영화를 넘어서 이번엔 세계 최초의 유화 애니메이션이란 수식어를 달고 우리 눈앞에 다시 왔습니다.

이 세상에 어느 화가가 자신의 그림으로만 된 영화가 만들어질 수 있는지 상상이나 했을까요.

삶은 불행했을지 모르지만 그렇게 당신의 그림들은 우리에게 또 하나의 방식으로 말을 걸어옵니다. 무언가 다른 정서적 울림이 되어.


“죽어서 묻혀버린 화가들은

그 뒷세대에 자신의 작품으로 말을 건다. “


당신을 아는 자의 확신과 알려는 자의 물음, 그 어디로도 이룰 수 없는 밀밭길에서


영화는 당신의 죽음을 쫒는 아루망 룰랭의 여정이지만 그 죽음의 미스터리는 결국 당신 삶의 증거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고 그 삶은 인물들을 통해 아루망 룰랭에게 확인시켜 주는 것뿐입니다. 아루망은 다소 혼란스러워하지만 결국 당신이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어떻게 왜 죽어야 했는지 하는 물음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한 채ㅡ 어쩌면 더 이상 의미가 없었기에ㅡ돌아옵니다.   

죽음의 원인에 대해 집착하고 알아내려는 주인공 아루망 룰랭에게 “당신은 그의 죽음에 대해 그렇게나 궁금해하면서 그의 삶에 대해선 얼마나 알죠?”라고 마르그리트가 묻는 장면은 당신의 유작인 <까마귀가 나는 밀밭>

에서 펼쳐집니다. 그건 짧은 생애지만 어쩌면 죽음보다 광활한 밀밭만큼 컸을 삶의 흔적을 아는 것이 죽음을 이해하는 것보다 더 의미 있는 일이라고 말하려는 건지 모릅니다.


“고통의 순간을 바라보면

마치 고통이 지평선을 가득 메울 정도로

끝없이 밀려와 절망하게 된다.

하지만 우리는 고통에 대해,

그 양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다.

그러니 밀밭을 바라보는 쪽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그게 그림 속의 것이라 하더라도. “ 


마르그리트은 당신이 (화가로써) 천재였다고 말합니다.

비어있는 여백을 채우기 위해 식지 않았던 그림에 대한 애정, 내재된 광기가 쏟아내는 열정, 그리고 영감으로 번득이는 혼은 사라지지 않는 영원히 명멸하는 빛 같은. 아마 모든 사람들이 생각하는 당신 일 겁니다.

그럼에도 후세가 당신을 기억하는 건 단순히 화가로서의 재능보다도, 불꽃처럼 살다 간 예술가로서의 삶보다도, 피안에 있는 그 강렬한 무엇이 아닐까요.

오직 ‘빈센트 반 고흐’ 로만 정의될 수 있는...   


This world was never meant for one as beautiful as you...

(이 세상은 결코 당신처럼 아름다운 사람을 위한 곳이 아니었어요.)

                                         - <Vincent> 가사 중 -





"인용문"  반 고흐, 영혼의 편지(예담.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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