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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용팔 Mar 04. 2021

"미나리, 원더풀!" 이지만...

<스포일러 포함>

영화가 원더풀하다는 얘기가 아니다. 영화가 내는 소리는 또렷하다. 80년대 이민 노동자 가족의 초상화다. 그들이 정착하면서 겪는 삶과 애환이라는 주제를 어디에서나 뿌리를 내리고 산다는 식물인 ‘미나리’라는 지극히 한국적인 제목으로 상징하고 있다. 흙 색깔 때문에 이곳에 왔다는 강한 자아의 소유자인 남편 제이콥(스티븐 연)과 트래일러 집을 보고 어이없어하는 헌신적인 아내 모니카(한예리), 선천성 심장병을 가진 아들 데이빗과 의젓한 딸 앤. 그들의 삶에 불쑥 얹친 할머니(윤여정), 이렇게 4+1 식구의 이야기다(디테일한 줄거리는 이미 많은 관련 기사에 실렸으니 생략하도록 하자).


부자가 바라보는 공간은 가꾸고 살아가야할  땅이다. 도전(개척정신)의 시선이기도 하다.    출처) 구글 스틸컷


영화 전체의 흐름은 클라이맥스까지 큰 흔들림 없이 전개된다. 마치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는 것처럼 그런 하나의 호흡으로 영화는 진행된다. 부부간의 갈등, 티격태격하며 사이를 좁혀가는 할머니와 손자의 교감, 주변인들과의 관계를 마주하며 영화의 흐름에 자연스럽게 협력하게 된다.


이주 노동자들의 이야기는 과거에도 없진 않았다. ‘90년대 대종상을 받았던 <애니깽>은 멕시코에 도착해 토착인 들의 착취와 모진 학대를 견뎌내는 한국인들의 삶을 그린 영화였지만 드라마이기보다는 시대극에 가까웠다. 역사적 사실이라는 전체성을 아우르는 작품이 <애니깽>이라면 <미나리>는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잔잔하게 벌어지는 개별성의 이야기들을 서정적인 화면에 그리고 있다. 문화와 정서의 다양성을 웃음이라는 코드와 함께 보여줌과 동시에 그 차이와 간격을 가족이라는 존재를 통해 화합을 모색한다. <미나리>가 주목받는 이유가 바로 가족의 사랑과 화합이라는 동서양의 공통분모에서 느끼는 동질감이지 않을까 싶다.


제목 미나리부터 시작해서 손자에게 고스톱을 가르치는 할머니, 친정엄마가 바리바리 싸 온 고춧가루를 맛보고 멸치에 우는 딸, 입안에서 밤을 물고 그 을 뱉어 손자에게 주는 할머니. 한약을 막대기로 쥐어짜는 장면 등 곳곳에 스며있는 한국적인 정서를 대하는 관객들의 반응과 표정어땠을지 상상해보는 것도 재미있다. 오랜만에 만나는 엄마를 보고 설레는 딸의 모습, 오줌 싼 손자에게 “페니스(고추), 브로큰” 으로 놀리는 할머니와 맞대응한다고 할머니에게 오줌을 마시게 하고 무슨 맛이냐고 놀리는 손자의 모습 등은 계속 되새김질하게 되는 사랑스러운 장면들이다.


카메라는 따뜻하면서도 객관적이다. 그들의 감정에 처음부터 개입하지 않으려는 감독의 의도된 시선이다. 영화 초반 방 안에서 대화하는 엄마와 딸, 중반 폴(월 패튼)로 인해 부부가 말다툼을 하는 장면에서도 카메라는 인물들의 감정에 관여하지 않고 바라본다. 오롯이 그들의 것이기에 그들만이 느끼고, 해결할 수 있는 있도록 슬며시 비껴선다.  

한 가지 흥미로운 건 이런 가족에 으레 나타나 헤집고 다니는 악역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주변인들은 친숙하게 다가오는가 하면 때로는 순수하다 못해 어리숙하기까지 하다. 농장 일 뿐 아니라 가족을 위해 헌신하는 현지인 폴은 나뭇가지로 수맥을 찾는다거나 주일에 십자가를 지고 걷는가 하면 병든 할머니를 위해 기도를 해주는 엉뚱하면서도 진지한 모습의 캐릭터다. 등장인물 하나하나에 부여된 이미지와 가족과의 관계가 이렇게 따뜻하기 때문에 영화의 마지막 타인이 아닌 가족(할머니)의 부주의로 일어나는 화재를 바라보는 시선은 더 안타깝고 힘들 수밖에 없다.


‘가족’은 영화의 단골 메뉴이면서도 늘 영화제가 외면하지 않는 영원한 테마다. 그런 의미에서 <미나리>는 갈등과 화합, 세대 역사, 개척정신, 역경 극복이라는 미국 영화가 수상하는 보편적 공식이 적용된 수작임은 틀림없다. 배우들의 연기 또한 이견이 없을 듯하다.

독립영화라는 여러 가지 제약과 한계가 오히려 영화의 앙상블을 더욱 빛나게 한 결과다. 선댄스영화제 시상식에서 화제가 됐던 윤여정의 인터뷰 발언처럼 제작비를 아끼려고 함께 생활한 덕분에 가족이 되었다는 배우들의 모습에서 진짜 가족을 본다. 시나리오를 직접 쓴 정이삭 감독의 개인적인 스토리이기 때문에 사실감도 더해진다.

서양인에게 K-할머니는 너무 이기적 일지 모른다. 미워할 수 없는 우리 할머니를.                       출처) 구글 스틸컷   


무엇보다 영화의 8할은 할머니역의 배우 윤여정이 살려 나간다. 가족영화라는 장르적 특징 이자 한계라 할 수 있는 스토리의 진부함 ‘‘감동스럽다 못해 가슴이 아프도록 슬플 것이 뻔해’라는 공식으로 단락화 되어 질 수 있는 영화는 짜잔 하고 등장하는 할머니로 인해 그 전과 후로 확연히 나뉜다. 그녀의 존재감으로 영화는 관객이 즐거워해야 한다라는 이유가 명백해진다. 능청스러우면서도 막가파식으로 하는 행동조차 미워할 수 없는 우리 K-halmoney(할머니)의 연기는 영화 클라이맥스, 뇌졸중 상태에서 자신의 실수로 채소저장고가 불타는 모습을 보고 혼이 나간 듯 걸어가는 장면에서 연기의 몰입을 보여주는 최고조의 감정 Scene으로 끌어올린다.

그런 할머니를 돋보이게 하는 역할은 손자인 데이빗이다. 할머니와 옥신각신하며 발산하는 천진난만한 모습은 거의 생활 연기에 가깝다. 비중이 작지 않음에도 주요 인물 중 유일하게 연기 경력이 없다는 아이의 연기를 이끌어낸 감독의 연출력이 놀라울 따름이다. 윤여정이 탈락한 골든글로브 여우조연상 후보였던 영화 <News of the world>의 12살 소녀 ‘헬레나 젱겔’ 의 연기만큼 보는 즐거움이 크다(웨스턴무비로 이 영화는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미나리, 원더풀’은 극 중에서 할머니가 손자 데이빗에게 미나리를 설명하면서 노래처럼 읊조리는 대사다. 왜 영화가 <미나리> 인지, 가족과 미나리가 어떻게 연결되는지(원더풀 인지)를 마치 관객들에게 친절하게 가르치고 있는 이 장면에서 작년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은 <기생충>의 가족이 오버랩 된다. 여전히 후유증이 남아있는 악몽 같은 가족을 경험했던 터라 이 사랑스러운 가족의 이야기에 더 귀 기울이게 된다ㅡ미나리에서 할머니가 손자에게 해 주는 “보이는 게 안 보이는 것보다 더 낫다, 숨어있는 게 더 무섭고 위험하다.” 말은 마치 <기생충>을 빗대어 <미나리>가 얼마나 착한 영화인지를 드러내 보이려는 것 같다ㅡ두 영화 모두 해피엔딩으로 끝나지는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기생충> 마지막에 아버지를 구해낼 방법을 상상하며 흐르는 아들의 내레이션에서 실현 불가능한 절망을 발견하게 된다면, 사위가 미나리 밭을 보고 “할머니가 좋은 자리를 찾으셨어.”라고 하는 마지막 대사는 이제 뿌리를 내리고 자라는 미나리처럼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희망의 메타포다.

상실은 더 큰 도약을 준비한다. 척박한 환경 속에서 뿌리내리고 적응하는 미나리 처럼.             출처) 구글 스틸컷


예상대로 골든글로브 최우수외국어영화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이 나왔다.

안타깝게 미국에서도 어이없는 자격 기준 미달로 골든글로브 작품상 후보에 오르지 못한 논란을 조금이나마 보상받은 셈 치자. 오히려 골든글로브의 그런 보수성이 실과 득을 동시에 가져다주고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뒤를 이을 오스카에 좀 더 기대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다시 한번 오스카의 수상소감을 한국어로 듣는다면 코로나의 신음을 조금이나마 보상받지 않겠느냐는 추측을 해보면서도 한편으로 <기생충> 수상 때처럼 수상자들에게 짜빠구리 대신 미나리 무침이라도 대접하겠다고 부르는 불상사가 발생할까 봐 우려스럽기도 하다.     


관객들이 영화에 감정이입을 하는 건 그 어떤 이미지나 상황보다는 음악 때문이라고 한다. 골든글로브 주제가상과 음악상 후보에 오를 만큼 음악이 훌륭하고, 서정적인 풍경의 화면과 잘 어울린다. 한혜리가 부른 Rain song인데 개인적으로 가사 없이 화면에 흐르는 OST가 더 오래 남는다.    


<미나리>는 해석의 영화가 아닌 기억의 영화다. 세대별로 또는 세상별로 느껴지고 와 닿는 질감의 차이는 있겠지만 이구동성으로 이 영화를 정의하는 "보편적인 인간의 정서"라는 다소 고전적 주제에는 공감한다.

봉준호 감독의 “<미나리>는 아름답고 보편적이다”라는 넘치지 않는 영화평처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다.

다만 우려되는 한가지. 우리에겐 익숙한 정서를 서양인들은 흥미로운 시각으로 바라봤고 이런 요소들은 영화적 재미를 한층 끌어올렸을 것이다. 때문에 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이질적인 풍경을 그들은 낮설면서도 색다르게 수용할 수 있지만 그런 소소한 에피소드들이 일상인 우리에게는 크게 감흥을 주지 못할 수도 있어 의외로 영화에 대한 기대감이 작은 실망감으로 바뀔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해외에서 받은 호평 일색과 여러 영화제에서 수상했다는 이름값 때문에 ‘나도 무언가 감동을 해야지’라는 어거지식 관람만 아니라면 엔딩 크래딧이 다 올라갈 때까지 오래 자리에 머물게 해 줄 수 있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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