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미쳤어! 제정신이냐? 어디 엄마, 아버지도 없는데...”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는 나는 문자를 융단폭격하듯 날렸다.
“죄송해요. 집이 너무 멀어서 아침 비행기라 늦을 것 같아서... 불편하셨으면 죄송합니다.”
둘째 녀석의 변명은 구차하게 돌아왔다. 결국 가장 강력한 폭탄이 된 문자가 녀석에게 던져졌다.
”불편? 네가 아직 상황 파악을 못했나 본데 암튼 와서 보자.“
“아버지 제가 잘못한 게 어떤 건지 말씀해주실 수 있어요? 여자친구 데려온 게 문제예요?”
녀석이 방어막을 구축한다. 그래도 전세는 이미 기울어졌다. 시한폭탄이라 내가 터질 때만 숨죽여 기다려야 할 것이다.
아이는 여행 중이다. 아버지의 무차별 문자폭탄에 여행 기분은 완전히 잡쳐버렸을 것이다. 내가 알 바 아니었다. 그놈만큼 나도 여행의 아름다운 마무리를 잊은 지 오래다.
“그래도 그렇지 얘가 여행 갔는데... 와서 야단치던지 그래야지, 너무 심하게 한 거 아니야?”
지친 아내의 목소리에는 부자간의 대화에서 간파한 앞날을 걱정하는 피로감이 묻어있었다. 우리 부부도 여행에서 이제 막 집에 도착했다. 오늘 아침에는 녀석이 떠났다. 서로 반나절 정도가 엇갈린 여행이었다.
발단은 집에 들어선 후부터다.
거실에 선 아내가 머뭇거린다. 집안의 낯섦이 전해졌다. 뭔가 새롭거나 달라져 있음을 감지한다. 역시 여자들의 직감은 예리하다. 두리번거리던 아내는 바닥에서 뭔가를 발견하고 줍는다.
긴 머리카락. 나는 대수롭지 않은 듯 쳐다보는데 아내가 한마디 툭 던진다.
“생머리카락인데?”
“그게 뭐 어때서?”
아직 뭔가 제대로 파악이 안된 내가 묻자
“내 머리카락은 파마해서 곱슬곱슬한데....” CSI 마니아다운 눈썰미였다.
“아니... 그럼 그 머리카락이 당신 거가 아니란 말이야?”
“응”
“그럼 누구꺼.... 혹시.... 이노무 자식이.”
그제야 머리에 그려지는 그림에 충격을 받는다.
한창 여행의 맛에 빠져있을 녀석이 타고 간 비행기만큼 빠르게 문자가 전달됐다.
“너 집에 누구 데려왔었어? 바른대로 말해. 증거가 있으니. 솔직하게 얘기 안 하면 경비실에서 CCTV 확인한다.” 처음부터 빠져나갈 구실을 주지 않을 태세로 녀석을 몰아붙인다.
불길한 예감은 틀리는 법이 거의 없다.
“여자친구 데려왔었음”
핸드폰에 찍힌 노란 바탕의 검은 글씨는 바리케이드처럼 나의 다음 메시지를 단숨에 막아버렸다. 어이가 없다. 한참 심호흡을 하고 생각하다가 결국 폭발한다.
“너 미쳤어! 제정신이냐? 어디 엄마, 아버지도 없는데...”
나와 아내의 (제주도)여행 스케줄이 잡히자 녀석도 같은 곳을 여행을 가기로 했다고 알려왔다. 그럼 같이 가자고 하는 제 엄마의 진담 반 농담 반을 “친구들과 가야지”라며 코웃음으로 넘겼다. 물론 우리는 그 친구들이 복수가 아닌 단수이고, 동성이 아닌 이성이라는 걸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30살을 넘긴 아들에게 우리 부모들이 자식들에게 해준 주옥같은 훈시를 대물림한다고 통할 리가 없었다. 그랬다간 오히려 꼰대 부모로 낙인찍히기가 십상이다. 그저 ‘조심해라’라는 아주 미니멀한 말투로 엄마 아버지가 시니컬하면서도 오픈된 부모라는 걸 보여준다.
그런 부모를 녀석은 더 한발 앞선 최첨단의 현대식 부모로 탈바꿈시켰다.
집에 아무도 없을 때 여자 친구를 집으로 데려와도 엄마, 아버지가 눈감아 줄 거라는 믿음을 가질 만큼.
비행기를 타야 하는데 여자친구 집이 멀어서 공항이 가까운 우리 집에서 자고 출발하려고 했다는 것이 녀석의 의도였다. 제 딴에 베푼 여자친구에 대한 배려(?)는 부모에게 배은망덕으로 돌아왔다. 이건 부모의 오픈된 마인드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가정교육의 문제였다. 치밀어 오르는 화를 억누르지 못하고 있는데 아내가 한마디 한다.
“걔가 잘못은 했지만, 너무 감정적으로 대하지 마. 다 큰앤데 지가 알아서 하겠지.”
아내의 말을 듣자니 더 열이 오른다.
“아니, 누가 연애하지마라고 했어? 제 혼자만 연애하는 거야? 이건 아니잖아!”
핏대를 있는대로 다 세우며 화를 내자
“내가 잘 얘기할 테니까 당신은 가만히 있어.”
아내는 어떻게든 사태를 진화하려 애쓴다.
“뭘 잘 얘기해, 따끔하게 혼을 내야지.”
녀석이 돌아왔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내의 사전 작업 때문이 아니었다.
<30살의 아들이 여자친구와 여행을 갈 예정인데 집이 멀어서 부모 없는 집에 데려와 하룻밤 묵게 하고 다음 날 같이 떠났다> 라는 소설에나 등장할 충격적인 팩트에서 나는 어떤 단어, 어느 행위에 초점을 맞추고 녀석을 야단쳐야 할지 정확한 판단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엄마, 아버지 없을 때 왜 여자친구를 집으로 데려왔는지 묻는다면 이미 그 이유를 얘기했기 때문에 재방송까지 들을 필요는 없다. 근데 왜 집이냐고 물으면서 나는 녀석의 입에서 어떤 대답이 나오길 바랄까. 그럼 모텔로 갈까요? 라고 말하는 녀석의 멱살이라도 잡고 “이 자식이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라고 더 화를 내야 할까.
집에 데리고 와서 뭐 했냐고 물어보라고?. 나는 대체 무슨 답을 원하면서 그런 질문을 해야 하는가.
큰아들을 23살에 낳았다.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나 때문에 집에 한바탕 소란이 일고 나서야 우린 받아들여졌다. 엄마, 아버지의 차가운 시선 속에 아내와 핏덩이를 집으로 데려왔다. 시집살이가 온전할 리 없었다. 아내는 묵묵히 견뎌냈고 내가 졸업을 하고 반듯한 직장을 얻고 나서야 기를 펼 수 가 있었다. 그리고 지금 이 상황의 당사자인 둘째 녀석을 얻었다.
지금도 간혹 훅치고 들어올 때가 있는 초기 결혼생활의 힘든 기억, 시월드 사람들의 냉대와 시망스러움을 견뎌야 했던 며느리로서 아내의 머릿속에 남아 오버랩 되는 뭔가가 둘째 녀석의 행동거지를 보면서 작동했을 것이다. 그런 경험 때문에 우리 부부는 아이들의 연애에 개입할 생각이 없고 최소한의 관심만 보일 뿐이었다. 결국 이번 사단의 제공은 자업자득이 아닌가 싶기도 해서 씁쓸함이 더하다.
요즘 젊은 세대의 연애에는 우선순위가 없는 듯하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주는 부담감에 쿨하게 반응하다 보니 사소한 문제에 얽매이지 않는다. 결혼에 대한 가치관은 그 순서와 절차가 필수가 아닌 선택의 문제로 바뀌었다. 우리 세대가 감당하기 힘든 부분도 없지 않다. 자식들에 대한 현실적인 문제에 막상 부딪혔을 때 과연 어디까지 용인하고 수용해야 할 것인가ㅡ앞서 얘기한 꼰대 부모로 보이면 안되는ㅡ하는 난제를 풀어야 할 지혜가 필요할 뿐이다.
부모는 두 가지 측면에서 자녀들에게 울타리가 되어야 한단다.
하나는 공감과 수용이라는 따뜻함이고, 다른 하나는 단호함과 일관성 같은 견고함이다. 아득한 옛날 얘기 같다. 부모의 무게감과 위엄을 보여주기에는 녀석들의 머리가 너무 커버렸다. 다툰다해도 이길 것 같지도 않다. 아무래도 아이들의 의견에 적극적으로 공감하고 수용해서 노후라도 대접받고 사는 게 현명할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