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용팔 Mar 27. 2021

헤어지지 않는 부부는 충분히 행복하다.

“우리 헤어지자.”

“뭐? 헤어지자는 얘길 해물이라곤 쥐꼬리밖에 없는 50년 전통의 해물파전 집에서 해.”

“지금 장소가 중요해?”


과거 어느 개그 프로그램에서 유행했던 연인들이 주고받는 대사다. 둘 중 하나가 좋은 분위기를 잡으려 하면 다른 하나가 꼭 초를 친다. 그렇다고 헤어지는 것도 아니다. 매주 나와 그렇게 한 번씩 서로의 속을 긁어놓는다. '헤어지자'는 말을 너무 쉽게 입에 올린다. 이 심각해야 할 말에 관객들은 좋아라 웃는다. 개그이니까.


우리 부부도 연애 시절 헤어지자는 말을 뽀뽀만큼 자주 했던 것 같다. 개그가 아니라서 심각했다. 그 이유를 다 기억할 수 없지만 유치한 말다툼의 뒤끝이었던 것은 확실하다. 내가 먼저 꺼낸 적은 거의 없다. 그 말은 오롯이 아내의 언어였다. 물론 우리도 헤어지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분위기를 잠재운 것 내 역활이었기 때문에.

우린 학교에서도 누구나 알아봤을 정도로 유명한 C.C였다. 만나는 두 손은 언제나 포개져 있었다. 그게 행복이었으니까.ㅡ그래서 행복의 반대말이 불행이 아니라 외로움이라는 거다ㅡ 연예 시절부터 지금까지 40년의 손을 잡고 다녔으니 한쪽 손에서 다른 한쪽까지 이야기들이 넉넉히 쌓여 있긴 할 거다. 행복한 순간이 있었다면 그렇지 못했던 시간도 있었을 테고, 아주 헤어지지는 않았지만, 안방에서 헤어져 누군가는 거실 소파에서 잘 때도 있었다. 그래도 여전히 같이 사는 걸 보면 그리 나쁜 동행은 아니었나 보다.


 우리는 너무 일찍 어른이 됐다. 아직 인생이라는 출발 선상에 서지도 않았는데 스타트의 총성을 들었다. 벌컥 부모가 됐고 가장이 됐다. 행복이란 걸 너무 가볍게 여긴 탓이었다. 그 때문이었을까. 그만큼 시련도 급히 왔고 한꺼번에 들이닥쳤다. 낯선 어려움이었다. 저항할 수 없었기에 순응해야 했고, 거침이 없었기에 넘을 수도 있었다. 이른 경험들은 그 후 각다분한 삶 속에 던져진 우리를 지탱할 힘이 되었고, 믿음에 의지하면서부터는 좀 더 지혜로울 수 있음을 깨닫게 됐다. 그 믿음이란  종교적 신념이었다. 당장 행복을 가져다주는 건 아니지만 이르는 길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치 Keyboard의 한글. 행복의 ‘행’이 영문으로 ‘god’인 이유가 행복과 신의 관계, 즉 신을 느끼고, 행복을 느끼며 살아가라는 것처럼.


일본 애니메이션의 거장 오시이 마모루는 그의 에세이 <철학이라 할 만한 것>에서 행복의 요소로서 파트너(부부)의 존재를 빼놓을 수 없다고 했다. 특별히 함께 있어서 즐거운 것도 아니지만ㅡ우리처럼 오래된 연인을 말하는 거다ㅡ서로 공기 같은 존재가 되어버려 없으면 아주 곤란해진다고. 부부가 오래되면 사랑보다는 정으로 사는 사이라고 하는데 어느덧 그 시기에 접어들었는지 모른다. 사랑의 유통기간은 마감되고 정이라는 구제(舊製)가 신상품이 되어 사랑의 자리를 대신하는 사이. 문득 그 둘의 상관관계가 궁금해 <정과 사랑>을 인터넷 검색창에 입력하니 이런 물음들이 올라온다.


'정과 사랑의 차이는 뭘까요?'

'정과 사랑을 구분하는 법 좀 알려주세요'

'정과 사랑에 대해서 생각이 어떠신지요'

의외로 그놈의 정과 사랑 때문에 고민하는 연인 사이, 부부 사이가 많은가 보다.


배달맛집 "정과사랑" 입니다. ^^

밑으로 스크롤 하다 눈에 툭 걸린 맛집 광고를 훑고 넘기려는 순간 마른 웃음을 지으며 잠시 머문다.

종종 아내는 말다툼으로 서먹해진 분이기를 남편이 좋아하는 메뉴로 풀곤 했다(물론 자기가 잘못했다는 뚜렷한 확신이 있을 때만 가능한 일이다). 아내가 타협점을 모색하고 있다는 신호다. 아내는 음식만큼 정과 사랑을 쏟아 만들 수 있는 없다고 믿는다. 그런 노력에 나도 긍정적으로 반응한다.


"나물 맛있네."

코딱지 만큼은 아직 내 기분이 원상복구가 되지 않았음을 내비치는 톤으로 먼저 말을 꺼낸다.


"된장으로 하려다가 당신이 초고추장을 좋아해서 그걸로 무쳤어. 더 맛있지? " 

나물을 버무린 초고추장처럼 살짝 양념 소스를 입힌  목소리로 아내는 내 대답을 유도한다.


"뭐... 괜찮네."  

짧은 글짓기로 말을 끝내자 기다렸다는 듯 아내의 말문이 터져 나왔다.


"오늘 마트에 갔더니 봄나물이 많이 나왔더러구 그래서 이것저것 보다가...."


벌어진 상처는 음식이라는 치료제로 아물어간다. 저녁 설거지는 내 담당이 되고, 아내는 과일을 깎아 내옴으로써 애로(가 있었던)부부의 홈드라마는 해피하게 마무리된다.


톨스토이는 행복은 타인을 사랑하는 능력이라고 했다. 궁극적인 행복은 결국 ‘관계’라는 틀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고 부부라는 관계는 행복과 가장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

행복은 감정과 같은 정서적 영역뿐 아니라 상황과 시간의 물리적 영역이 더해진다. 순간순간의 행복이라는 개별성보다 영원한 행복이라는 전체성을 추구하게 되지만 그런 행복을 단번에 갖는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맞닥뜨리고, 부딪쳐 겪으면서 이해하고, 믿는 가운데 행복을 알아간다. 부부는 두 사람 몫의 역경이 만든 행복이라 더 깊어지고 잘 풀어지지 않는 법이다.


여전히 우리는 애로부부ㅡ방송타는 그 애로가 아니라ㅡ로 살고 있다. 다만 어긋나는 일에 물러날 줄을 알고 화해할 때를 놓치지 않으려 한다. 행복이 성적순이 아니라는 아주 오래된 농담(?) 때문에 웃으며 살 수 있다. 사는 동안에 헤어짐이란 선택지가, 살아가야 할 다른 우선순위에 밀려 굳이 필요가 없어져 버린 것이다. 마주 보아도 싫지 않으면 그걸로 됐다. 그렇게 살다 보면 애써 찾지 않더라도 그럭저럭 행복하게 된다.

부부이기 때문에.


우선순위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행복이라면, 헤어지지 않는 부부는 충분히 행복하다. 그것으로 족한 것이다.

         - 오시이 마모루, <철학이라 할 만한 것> - 

매거진의 이전글 아내가 이길 수 있는 사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