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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용팔 May 23. 2021

회초리가 된 선물

선물하면서도 그다지 기쁜 마음으로 주지 못하는 때가 있다.

선물이란 모름지기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 모두 꽉 찬 마음의 정성이 있어야 한다. 행복하게 주고 고마움으로 받고. 그런 정으로 오가야 선물의 의미가 제대로 살아난다. 주는 쪽이 받는 쪽 마음을 헤아려 준비 해야하기 때문에 상대방 반응에 더 민감할 수 밖에 없다. 종종 애써 준비한 선물이 오히려 받는 쪽 기분을 상하게 하거나 안 주는니만 못하는 일이 생기기도 한다. 아랫사람이나 동년배인 경우는 어느 정도 감내할 수 있지만, 그 대상이 웃어른들이라면 상황은 또 달라진다.     

   

장인어른께 지팡이를 사 드렸다.

팔순을 훨씬 넘기셨어도 컴퓨터로 자료를 정리하시고 시키신 일은 시간이 지나도 꼭 챙기실 만큼 기억력은 나보다 한 수 위지만 오랜 신장투석으로 몸이 많이 쇠약해지셨다. 다니시기가 불편하고 가끔 힘이 없어 넘어지신다는 장모님 걱정에 내 주머니 사정도 부담이 없는지라 한걸음에 건강용품 판매점을 찾았다.

잠시 주저하기도 했다. 주는 사람 성의와는 상관없이 받으시는 장인어른으로서는 분명 정이나 호감이 갈 만한 선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세월의 무게를 떠받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들어야 하는, 나이 듦의 품격(?)을 고스란히 인정함으로써 생을 서글퍼지게 만드는 도구가 바로 지팡이 아닌가.

당신 또한 무슨 일이든 혼자 힘으로 해내시려는 의지가 강하나 보니 평소에도 “난 지팡이 같은 거 필요 없어”를 시위대 구호처럼 선언하고 다니셨던 터라 자칫 선물이 아니라 애물이 될 듯 싶었다. 괜한 죄의식마저 들었다. 개구쟁이 시절 회초리가 되어 날아들던 호랑이 할아버지의 지팡이처럼 내게도 그리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쉽게 결정할 수가 없었다.  

고민 끝에 설마 혼내기야 하시겠냐는 불안한 자위로 무장한 체 씩씩하게 사들고 가 장인어른 앞에 내밀었다. 역시 타박하는 말씀이 제일 먼저 귀에 부딪힌다.

“그런 건 뭐하러 사와. 난 필요 없다는데...."

지팡이의 튼튼한 위력을 먼저 체험하고 계신 장모님의 두둔하는 발언 덕분에 다행히 두 번째 화살은 비켜 갔지만, 여전히 장인어른 눈치를 살피기에 바빴다. 그 순간이었다. 장인어른 얼굴에서 평소 강단 있는 모습과는 거리가 먼 왠지 쓸쓸하고 체념 한 듯한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사실 장인어른의 지팡이무용론은 당신 고집에서 나온게 아님을 모르는바 아니다.

장인어른 한 손은 늘 장모님을 위해 준비된 손이었다. 장모님 또한 오랜 지병으로 거동이 불편하셔서 으레 지팡이를 짓고 다니셨고, 그런 장모님과 늘 동행하시는 당신 손에는 장모님의 다른 한 손이 포개져 놓였다. 장인어른 손이 또 하나의 버팀목 역할을 해 온 것이다. 그렇게 80여 년을 두 발로 옹골차게 지탱하면서 장모님을 위해 내놓았던 손이었다. 그런 손을 이제 당신도 더는 지탱 할 수 없음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그래서 고작 한 치의 막대기에 기대야 함을 쉽게 허락할 수 없지 않았을까.


장인어른이 처음으로 지팡이를 드시던 날, 그 어색함에 멋쩍게 웃으셨다.

지팡이를 들지 않으면 같이 나가지 않겠다는 장모님 으름장에 마지못해 잡으셨다. 두 분이 나란히 지팡이를 드시고 첫 외출을 하시자 나는 베란다에 서서 두 분 모습을 지켜보다가.... 그만 온몸에 힘이 빠져 버렸다. 아뿔싸, 장인어른이 우려하셨던 일이 터져버리고 말았다.

한 손을 장인어른에게 의지했던 장모님이 이제 장인어른마저 지팡이를 드셨으니 두 분이 각기 한 손에는 지팡이를 드셨고, 다른 한 손에는 여느 때처럼 서로 손을 붙잡고 있는 모양새니 다니기가 뭔가 맞지를 않고 불편하게 되어 버린 게 아닌가. 결국, 서로 손을 놓고 마치 일렬종대처럼 나란히 걷는 어정쩡한 동행이 되고 말았다. 그 모습이 영 불만이신 장인어른은 나를 찾는 듯 연신 베란다를 올려 보고 불평하시는 표정을 지셨다. 나는 낭패감에 두 분이 들어오시기 전에 자리를 피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재빨리 베란다에서 뒤로 물러선다. 역시 선물이란 무조건 받는 사람의 기분이 최우선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새삼 깨달으면서. 이윽고 저 어색한 나들이를 빨리 끝내고 들어와 결국 회초리가 될 운명인 지팡이로 분위기 파악 제대로 못 한 사위에게 쏟아내실 장인어른 불호령이 벌써 차갑게 울려오고 있음을 느꼈다.    


“이 사람아! 그러게 왜 지팡이는 사 들고 와서 할멈 손도 못 잡고 다니게 하는 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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