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거 없지만 별거인 시간
이번 휴가는 집에 가지 않고 소소하게 이것저것 하며 보내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여느 때와 다를 것 없이 엄마랑 연락을 하던 어느 날에 마음을 바꾸었다. 엄마의 하루하루가 참 단조롭고 심심할 것 같은 이유에서였다. 엄마랑 저녁에 요가 수업 마치고 둘 중 누구 한 명이 치킨 먹을래? 맥주 마실까? 하면 어김없이 무너지던 야식의 유혹도 추억이다. 사실 지금 엄마에게는 선선한 바람이 부는 여름밤에 같이 치맥을 할 딸이 필요했다.
엄마가 집에 오면 일정이 어떻게 되냐고 물었을 때, 아무 일정 없어~ 집에만 있을 거야. 엄마랑만 있을 거야. 하고 말했을 때 엄마는 그러라고 했다. 어차피 서울에서 온 사람 여기저기 돌아다니면 안 된다고. 시간도 짧게 왔지만 그냥 이번에는 그러고 싶었다. 그리고 정말 엄마랑만 있었다.
엄마랑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엄마와 서점에 가고, 엄마가 책을 사주겠다고 해서 책도 선물 받았다. 단골 LP가게도 함께 가고, 집에서 함께 김밥을 말았다.
엄마는 귀엽게도 젤리를 좋아해서 예전부터 나는 집에 들어갈 때면 한 봉지씩 사갔었다. 그럼 엄마는 그걸 비타민 마냥 조금씩 나누어먹었다. 이번에도 운동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편의점에서 젤리 두 봉지를 샀다. 그리고 짧은 쪽지와 함께 올려두고 나왔다.
새벽 다섯 시에 엄마는 내가 먹고 싶다던 김밥을 따끈하게 말아주고, 가장 좋아하는 반찬인 두부조림도 싸주었다.
기차를 타고 잘 출발했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엄마는 휴가 시간을 엄마한테 할애해줘서 모처럼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고 답장이 왔다. 고작 이게 할애라니. 내가 태어나고부터 당신은 늘 나에게 당신의 시간을 할애해줬는걸요. 엄마는 조심히 가고, 건강히 잘 지내고, 열심히 살라며. 늘 그렇듯 당연한 삶의 과제와 사랑이 깃든 응원을 보내주었다.
외워야 할 번호가 많아지고, 자주 쓰지 않는 번호는 기억에서 잊히거나 가물가물해진다. 가끔 무의식 중에 손가락이 대구 집 현관 번호를 누를 때가 있다. 그러다가 아차. 하고 다시 번호를 누른다.
밥이 고프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엄마의 두부조림을 떠올린다. 여러 순간 속에서 익숙함을 부르고 있는 것이다. 익숙하고 그리워할 것들을 남겨두고 나의 것들을 쌓아가며 다시 살아갈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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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집 앞 빵집 입간판에 빙수의 계절이 돌아왔어요. 팥빙수 4500.라고 적혀있었다. 속으로 지금 가을이 코앞인데 무슨- 하며 지나왔는데 생각해보니 여름의 문턱에서 서울로 와버렸으니 내가 이제야 이걸 본거구나, 싶었다. 빵집 사장님은 그저 성실히 여름을 보냈을 뿐.
없던 채소 가게가 생겼고 젊은 청년들이 운영하는 가게 덕에 동네는 조금 더 활기차 졌다. 엄마한테 물어보니 서글서글하게 장사도 잘하고 재료도 괜찮다고 종종 간다고 했다. 익숙하고 조금은 다른 동네 풍경이 나쁘지 않았다.
냉장고 문을 열었는데 무언가 그득그득 채워져 있다. 내가 좋아하는 여름 과일들로. 블루베리며, 복숭아랑 아오리 사과로 가득했다. 우리 엄마는 포도 좋아하는데.
엄마는 예전부터 어딜 갔다가 올 때 내가 좋아하는 과일을 누군가 선물로 주면 그게 하나라도 꼭 챙겨 왔다. 어느 날에는 복숭아 두 알, 어떤 날에는 참외 한 알 이런 식으로. 그러면 나는 엄마의 마음까지 더해진 맛있는 과일을 먹었다. 그날 밤 저녁에도, 다음 날 아침에도 복숭아를 열심히 깎아먹었다.
떠나기 전날 밤, 엄마는 먼저 잠에 들고 나는 끝나가는 시간이 아쉬워 괜히 미적거리다 뒤늦게 잠든 엄마 옆에 누웠다. 창문을 활짝 여니 시원한 바람이 들어왔다. 기분 좋게 잘 수 있는 밤이었다. 예전에도 가끔, 밤이면 엄마를 꼭 껴안으며 시간을 살아낼 힘을 얻었다. 곰곰이 생각하다 그건 아무래도 괜히 간지러워 엄마 등에 손을 얹었다. 손바닥이 따뜻해졌다. 잘 살아낼 용기가 생겼다.
아빠는 늦봄, 그러니까 내 짐 가방을 꼼꼼하게 싸주던 그날 이후 여름이 끝나가도록 못 봤다. 유난히 뜨거웠던 여름 볕에 많이도 그을렸을 아빠 얼굴. 나는 아빠만 생각하면 마음이 그렇다. 고단하고, 참 재미없는 삶이겠다는 생각에. 그나마 자식 보는 재미로 살 텐데, 이제는 너무 커버려 품에 잘 들어오지도 않는 몸과 마음이 되었다. 그런 아빠와 통화를 할 때면 나는 괜히 목소리를 가다듬는다. 씩씩하고 밝게.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영상 통화를 어려워했던 아빠는 어제는 먼저 영상 통화를 걸어왔다. 그런 모습이 귀엽고 웃겨서 많이 웃었다.
마음처럼 잘 되지 않을 때, 삶이 참 어렵다고 느껴질 때면 나를 가장 사랑하고 내가 가장 사랑하는 두 사람을 떠올린다. 권태로운 일상도, 어떤 고단함도 묵묵히 이겨냈을 두 사람에게 사랑과 존경을 보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