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살고 싶지가 않다거나, 이렇게 살아서 뭐해- 하는 질문 같은 게 생긴 건 아니었다. 삶이 메마르고 있다는 사실은 삶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었지만 결코 사는 것이냐 죽는 것이냐의 문제까지 가지 않았다. 그저 조금 덜 재미있어졌다 모든 것에서. 그냥 삶은 이렇겠지 생각했다.
이런 류의 권태로움이나 무기력함은 날이 갈수록 더해갈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매일 특별할 것도, 재미날 것도 없지만 그냥 이렇게 쌓이는 것이 삶이겠다고- 누구나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이다.
애써 나의 상태를 뒤로 한 채 그저 루틴에 충실하며 지내왔다. 여섯 시 오십 분에 일어나고, 씻고 출근 준비를 하고,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아침을 간단하게 먹고, 긴 시간 출근을 하고, 일을 하고, 퇴근을 하고, 다시 긴 시간 퇴근길에 오르고. 집에 도착하면 바로 옷을 갈아입고 달리기를 하러 가거나, 그렇지 않으면 냉장고에 남아있는 와인과 늦은 저녁을 먹으며 드라마를 보는 것과 같은 일들로 하루를 채웠다. 어찌 보면 하루하루를 권태로움과 충실함을 오가며 산 것이다. 그렇게 하루를 끝내고 나면 왠지 모를 성취감과 안도감이 느껴질 때도 있었다.
반복되는 것이 주는 안정감과 익숙함이 있는 반면, 반복은 나를 무디게 만들었다. 어떤 일에 크게 동요하지도 않았다. 크게 웃을 일도, 크게 슬퍼할 일도 없었다.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도 사라졌다. 그냥 지나가고, 스쳐가며, 하루를 사는 것 이상으로는 특별한 여력은 없었다.
의미를 찾는 게 중요한 나지만, 모든 일에 꼭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건 오히려 삶의 의욕을 떨어뜨리는 일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의미가 없어 보여 그 일을 할 수 없다- 이렇게 되어버릴 수도 있으니. 그저 그냥 해야 하는 일들도 많았다. 의미라는 게 하다 보면 생기기도 하고, 꼭 있어야만 하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그러다 보니 시간은 잘도 흘렀다.
어느 날, 브런치 어플이 내게 다정한 잔소리를 건넸다. 60일 동안 작가님의 글을 볼 수 없었다며, 작가님의 글이 그립다고 말했다. 오랜 시간 글이 업데이트되지 않으면 자동 알림이 설정이 되는 시스템이겠지만, 어쩐지 조금 고마웠다.
슬럼프라고 하기에도 어설프고, 인생의 권태기라는 인태기라고 하기에도 조금 어색한 시기를 살고 있다. 고작 삼십여 년을 살아가고 있지만, 이제야 조금 배워가는 것 같기도 하다.
어른의 삶이 생각보다 아주 근사하다거나 낭만적이지만은 않다는 것과, 모두가 그렇게 자신을 마주하며 외로운 싸움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그러다가 문득 오늘처럼 퇴근을 삼십 분 빨리 한다거나, 우연히 들어온 카페에서 밀크티가 생각보다 맛있다거나, 숙제 같았던 미루고 미룬 글을 60여 일 만에 쓴 이런 소소한 기쁨이 생길 때면 삶은 꽤 사소한 것들이 모여 조금 나아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