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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을 담는 사람 Nov 04. 2021

잉글리시 블랙퍼스트에는 반숙이 제격

떡볶이 국물에 달걀을 으깨는 일

달걀은 반숙보다 완숙, 팥빙수 위에 올라간 아이스크림은 섞으면 서운하고, 순대를 떡볶이 국물에 휘휘 저으면 조금 슬퍼지고, 엎친데 덮친 격 삶은 달걀을 국물에 으깨기 시작하면 눈물이 난다. 그랬던 나도 언제부턴가 빙수 위 아이스크림을 섞어도 괜찮아졌고, 완숙 아닌 반숙이 잘 어울리는 요리(예를 들면 오늘 만들어 먹은 잉글리시 블랙퍼스트와 같이 무조건 반숙이 들어가야 제맛이 나는 음식) 와는 잘 먹게 되었다. 심지어 그런 요리에는 역시나 반숙이지!라고 생각한다. 잔치국수, 칼국수, 냉면 같은 면요리는 좋아하지 않아서 내 돈 주고 사 먹어 본 적이 없었는데 요즘은 신기하게 가끔 생각이 난다. 언젠가 비가 올 적에는 칼국수 생각이 나서 무려(?) 자의로 시켜먹은 적도 있다. 글쎄 어제는 친구들과 종로에서 닭 한 마리를 먹으러 갔다가 국수사리에 반해 정신없이 면치기를 하며 내 인생 칼국수라 엄지를 들었다. 나 면 좋아했네, 하며. 그래도 여전히 떡볶이 국물에 달걀을 사정없이 으깨는 일은 마음이 어렵다.(이를 즐기는 분들의 취향은 존중한다. 나도 내 취향일 뿐이다.)


다소 까탈스럽고 지랄 맞아 변치 않을 것 같던 내 음식 취향도 차츰 변하고 있듯, 절대 안 된다고 여겼던 것들도 시간이 흐르면서 가지고 있던 생각이 조금씩 바뀌기도 하고,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것들도 조금씩 수용하게 되기도 한다. 사는 게 어떤 공식처럼 정확하게 떨어지는 것이 아니니까,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며 나름의 방법을 터득해가는 것이 삶을 꾸려나가는 일일 거다. 빙수에 아이스크림을 섞던 처음이 어려웠지 한번 섞고 나니 생각보다 큰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조금 더 유연한 태도를 가져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세월이 흐를수록, 나이를 조금씩 먹어갈수록 확언할 수 있는 게 점점 사라져 가는 것을 느낀다. 영원한 것은 없고 많은 것은 자연스럽게 바뀌어 간다. 아주 크게 어긋나지 않은 이상, 정답은 존재하지 않는 것도 같다. 혹시 아나요, 마흔이 되면 떡볶이 국물에 달걀을 사정없이 깨뜨리고 있을 사람이 나일지도 모를 일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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