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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지영 Dec 22. 2024

선은 달콤함도 쾌락도 아니다


"좋음이라는 특성을 가진 것은 어떤 사물이나 다른 특성을 가지는 것은 참입니다. 이건 마치 노란색이라는 특성을 가진 모든 것이 특정 종류의 빛의 파장을 만들어낸다는 명제가 참인 것과 같습니다. 윤리학은 좋음의 특성을 가진 모든 것에서 좋음과 다른 특성들을 발견하려고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너무 많은 철학자들이 (좋음 이외의) 다른 특성들을 지칭하면서 자신들이 좋음을 정의하고 있다고 착각해 왔습니다. 즉, 이들 "다른" 특성들이 좋음이라는 특성과 정확하게 일치한다고 여겼던 것입니다."(It may be true that all things which are good are also something else, just as it is true that all things which are yellow produce a certain kind of vibration in the light. And it is a fact, that Ethics aims at discovering what are those other properties belonging to all things which are good. But far too many philosophers have thought that when they named those other properties they were actually defining good; that these properties, in fact, were simply not "other," but absolutely and entirely the same with goodness.)(조지 에드워드 무어, <윤리학 원리> 중에서)


 이번 철학 명언은 좀 어렵습니다. 그래서 명언 자체를 예를 들어서 이해하기 쉽게 풀어 설명해 보겠습니다. 

아이스크림이 '맛있다'고 할 때를 생각해보세요. 아이스크림이 맛있는 이유로 우리는 '달콤하다', '부드럽다', '시원하다' 같은 특성들을 떠올립니다. 맛있는 아이스크림에는 이러한 특성들이 함께 존재하는 거죠.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점은, '달콤함'이나 '부드러움' 자체가 '맛있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설탕은 달콤하지만 그 자체로 맛있지는 않을 수 있습니다. 두부는 부드럽지만 모든 사람이 맛있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많은 철학자들이 범한 실수는 바로 이것입니다. '좋음'이라는 성질을 설명할 때 그것과 관련된 다른 특성들(예: 유용함, 즐거움, 이로움 등)을 들어 "이것이 바로 좋음이다"라고 정의내리려 했다는 것이죠. 쉽게 말해, "이 음식이 맛있는 이유는 달콤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하지만 '달콤함'이 곧 '맛있음'은 아닌 것처럼, 어떤 것이 가진 특정한 성질이 곧 '좋음' 그 자체는 아니라는 것이 이 글의 핵심입니다.


"좋음은 단순한 진리다"

 이제 조지 무어의 철학적 통찰을 설명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매일 “좋다”는 말을 사용합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이거 진짜 좋아”라고 말하거나, 친절한 친구를 보며 “좋은 사람”이라고 느끼죠. 그런데 “좋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으면 말문이 막힐 때가 있습니다. 철학적으로, ‘좋음’은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가장 익숙한 개념 중 하나지만, 동시에 그 정의를 명확히 내리기 어려운 가장 심오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이는 우리의 삶과 선택에 근본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철학자들이 꾸준히 탐구해 온 주제입니다. 철학자 조지 에드워드 무어(George Edward Moore)는 바로 이 질문에 도전하며 독창적인 답을 내놓았습니다.


선은 단순한 것이다

 무어는 그의 저서 <윤리학 원리(Principia Ethica)>에서 “선(good)은 더 이상 분석하거나 정의할 수 없는 단순한 속성”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무슨 뜻일까요? 색깔을 떠올려봅시다. 파란색을 설명하려면 “하늘의 색깔”이나 “바다의 빛깔”처럼 비유할 수는 있지만, 파란색 자체를 완전히 정의할 수는 없습니다. 그저 “파란색은 파란색”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죠. 마찬가지로, 설탕의 단맛을 설명하려 할 때도 “설탕은 단맛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외에는 단맛 자체를 정확히 정의하기 어렵습니다. 이처럼 선도 그 자체로 단순하고 직관적으로 알 수 있는 속성입니다.

무어는 선도 이와 같다고 말합니다. 선은 복잡한 요소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단순하고 직관적으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 개념을 질료적 단순성이라고 부릅니다.


자연주의적 오류: 선을 쾌락이나 행복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무어는 선을 쾌락, 행복, 혹은 효율성과 같은 속성으로 정의하려는 시도를 “자연주의적 오류”라고 불렀습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 “선은 곧 행복이다”라고 말한다면, 그는 “좋음”을 자연적 속성으로 환원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무어는 이에 반대합니다. 선은 행복이나 쾌락과는 다르며, 그 자체로 고유한 개념이라고 주장합니다. 우리가 “행복한 것이 좋은 것이다”라고 말할 때, 사실은 이미 선과 행복을 구분하고 있다는 점을 그는 지적합니다. 이 구분이 없다면 “왜 행복이 선인가?”라는 질문 자체가 성립하지 않겠죠.


선을 인식하는 방법 : 직관

 그렇다면 우리는 선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무어는 직관을 강조합니다. 어떤 상황에서 옳고 그름, 좋고 나쁨을 우리는 직관적으로 느낍니다. 길에서 넘어진 사람을 보고 돕는 것이 옳다는 느낌, 또는 누군가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깨달음은 복잡한 논리가 아니라 직관에서 비롯됩니다.


 무어의 관점은 이런 선의 직관적 인식을 철학적으로 정당화하려는 시도였습니다. 그는 선을 정의할 수는 없지만, 직관적으로 선을 느끼는 우리의 경험은 부정할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일부 철학자들은 직관에 의존하는 접근 방식에 반대하며, 직관이 주관적이고 문화적 배경에 따라 다를 수 있음을 지적합니다. 예를 들어, 한 문화에서는 옳다고 여겨지는 행동이 다른 문화에서는 부정적인 것으로 간주될 수도 있습니다. 이런 비판은 직관주의가 보편적인 도덕 기준을 제시하기 어렵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자연주의적 오류 비판의 의미

 무어의 통찰은 우리 삶에 깊은 울림을 줍니다. '좋음'이란 다른 어떤 것으로 완벽하게 설명될 수 없는, 그 자체로 온전한 가치입니다. 마치 우리가 파란색을 보고 직관적으로 '파랗다'는 것을 아는 것처럼, '좋음' 역시 우리의 직관적 이해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어떤 것이 '좋다'고 말할 때, 그것이 '유용해서', '즐거워서', 혹은 '이로워서' 좋다고 설명하려 합니다. 그러나 이는 마치 아이스크림이 '달콤해서' 맛있다고 정의하는 것과 같은 오류를 범하는 것입니다. 달콤함이 맛있음의 한 요소일 수는 있어도, 달콤함 자체가 맛있음은 아닌 것처럼 말입니다.


 무어는 선이 단순하고 분석 분가능한 개념임을 분명하게 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선을 자연적 속성이나 다른 개념으로 정의하려는 다른 철학자들의 시도가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여기에 해당하는 것이 당시 유행했던 진화론적 윤리학, 쾌락주의 윤리학입니다. 이런 윤리학들은 윤리학을 다른 학문과 가치에 종속된 학문으로 전락하게 만들었습니다. 무어는 이런 시도로부터 윤리학을 자연과학이나 형이상학으로 환원할 수 없는 자율적인 학문으로 만들고자 했습니다. 


 일상생활에 적용할 수 있는 통찰을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는 흔히 '이익이 되니까 좋은 것이다', '즐거우니까 좋은 것이다'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는 '좋음'이라는 고유한 가치를 다른 것으로 환원시키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진정으로 좋은 것은 때로 당장의 이익이나 즐거움과 상관없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곤경에 처한 타인을 돕는 일이 나에게 이익이 되지 않더라도 '좋은 일'임을 우리는 직관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좋음'은 그 자체로 인식될 수 있는 고유한 가치이며, 이를 이해하는 것이 올바른 삶의 방향을 찾는 첫걸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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