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속성을 말하면서 자신들이 '좋음'이라는 속성을 정의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철학자들이 너무 많습니다.(But far too many philosophers have thought that when they named those other properties they were actually defining good.)(조지 에드워드 무어, <윤리학 원리> 중에서)
영국의 철학자 **조지 에드워드 무어(George Edward Moore)**는 20세기 초, *윤리학 원리(Principia Ethica, 1903)*에서 독창적인 주장을 펼쳤습니다. 당시에는 진화론적 윤리학이나 쾌락주의 윤리학 등이 유행하면서, ‘선(善, good)’이라는 개념을 자연적 성질(예: 쾌락이나 적응력 등)로 환원하려는 시도가 많았습니다. 무어는 이러한 흐름에 맞서, “선은 그 자체로 단순하고 환원 불가능하며, 결코 다른 것으로 정의될 수 없는 고유한 가치”라고 강조합니다.
아이스크림을 떠올려 봅시다. 우리는 “아이스크림이 맛있다”고 말할 때, 그 근거로 “달콤하다”, “차갑다”, “부드럽다” 같은 특성을 들곤 합니다. 하지만 “달콤함”과 “부드러움” 자체가 곧 “맛있음”과 같은 것은 아닙니다. 설탕은 달콤해도 그 자체로 ‘맛있다’고 하기는 어렵고, 두부는 부드러워도 모두에게 ‘맛있다’고 통하지는 않으니까요.
무어가 지적한 오류도 이와 비슷합니다. “유용해서 좋다”, “즐거워서 좋다”, “행복을 주니까 좋다”와 같이, ‘좋음’을 다른 속성과 동일시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좋음’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무어가 ‘자연주의적 오류’라고 비판한 지점입니다.
무어에 따르면, ‘선(good)’이란 더 이상 분석하거나 정의할 수 없는 단순한 속성입니다. 예를 들어, “파란색이란 무엇인가?”를 완전히 설명하기란 어렵습니다. “하늘 색깔”이나 “바다 빛깔”이라고 빗댈 수 있을 뿐, 결국 “파란색은 파란색”이라는 직관적 이해에 의존합니다. 달콤함 역시 “단맛이 난다”는 느낌 외에 어떤 말로도 완벽히 정의하기 어렵습니다. 무어는 ‘선’도 마찬가지라고 말합니다. 선은 다른 개념으로 환원될 수 없는, 그 자체로 독립적이며 단순한 개념입니다.
자연주의적 오류(naturalistic fallacy)란, “선(good)”이라는 윤리적 개념을 쾌락·행복·적응력·효율성 등 자연적 특성으로 환원해서 정의하려는 시도를 가리킵니다. 예컨데 누군가 “선은 행복 그 자체다”라고 말한다고 합시다. 무어는 이것이 바로 자연주의적 오류라고 주장합니다. 왜냐하면 “행복이 선한가?”라고 묻는 순간, 우리는 이미 ‘행복’과 ‘선’을 구분하고 있기 때문이죠. 또한, 만일 선과 행복을 구분하지 않는다면 “왜 행복이 선인가?”라는 질문 자체가 성립할 수 없습니다. 무어가 보기에 ‘행복’, ‘쾌락’, ‘유용성’, ‘효율성’ 같은 자연적 특성들은 선과 다른 것이지, 선과 동일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선’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무어는 논리적 추론 이전에 직관을 강조합니다. 길에서 누군가 넘어진 것을 보면, 도와야 한다는 느낌이 번개처럼 떠오르거나, 누군가를 속이는 일은 ‘좋지 않다’고 직감하는 것 등이 그 예입니다. 이것은 복잡한 사전 설명이나 이론 없이도 우리가 직관적으로 ‘무엇이 선인지’를 느낀다는 것입니다.
물론, 직관에 의존하는 데 따른 반론도 있습니다. 문화에 따라, 개인 차이에 따라 ‘선’이 다르게 보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무어는 “직관적 인식”이 주관적 경험을 넘어 보편적이고 직접적인 방식으로 선을 파악하게 해준다고 믿었습니다.
“유용해서 좋은 것”, “즐거우니까 좋은 것” 등으로 쉽게 말하지만, 무어에 따르면 이것은 ‘좋음’을 자연적 특성에 귀속하는 오류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돕는 일이 나에게 당장 이익이 되지 않고, 심지어 위험이 따를 수도 있지만 우리는 직관적으로 “그것이 좋은 일임”을 압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봉사활동이나 기부에 헌신한다고 할 때, 그는 직접적인 쾌락이나 물질적 이득을 얻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행동이 “좋다”고 여겨지는 까닭은, 선이 본질적으로 다른 것(쾌락, 이익 등)과 구분되는 고유한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무어의 통찰은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과연 우리는 선을 무엇으로 정의하려 하는가?” 자연적 속성으로 ‘좋음’을 단정 짓는 것은 아이스크림의 ‘달콤함’을 곧 ‘맛있음’이라 치환해버리는 것과 같은 실수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이렇게 묻게 됩니다. “그렇다면 매일의 선택 속에서, 무엇이 ‘정말 좋은 것’인지 어떻게 식별할 수 있을까?” 무어가 제안한 답은 직관을 조금 더 믿어보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 직관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보장은 없지만, 최소한 “행복, 즐거움, 이익 그 이상의 어떤 가치”가 존재한다는 점은 우리 삶을 보다 깊이 있게 바라보도록 이끕니다.
일상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보세요.
“이 행동을 하는 이유가 정말 나의 쾌락이나 이익 때문만은 아닐까?”
“만약 어떤 행위가 전혀 이익이 되지 않아도, 나는 그것을 ‘좋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런 질문들은 ‘선’이라는 고유한 가치를 조금 더 분명히 느끼도록 해줄 것입니다.
조지 에드워드 무어는 “선은 달콤함이나 쾌락 같은 자연적 속성이 아니라, 그 자체로 단순하고 환원 불가능한 가치”라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윤리학이 단순히 과학·진화론·쾌락에 종속되지 않는 자율적 학문임을 주장했습니다. 무어의 철학은 “무엇이 진정으로 좋은가?”를 고민할 때, 우리가 직관과 독립적인 가치에 주목해야 함을 일깨워 줍니다. 이로써 우리는 그저 유용한 것이나 즐거운 것을 넘어, 더욱 근본적인 ‘선’을 추구하는 길로 한 걸음 나아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