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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는 알지 못하는 목적지가 있다

by 정지영

“모든 여행에는 여행자가 알지 못하는 비밀스러운 목적지가 있다.”

All journeys have secret destinations of which the traveler is unaware.)

마르틴 부버(Martin Buber), [Baal-Shem의 전설](1955) 중에서


길을 떠날 때 우리는 목적지를 정하고, 가방을 싸고, 방문할 장소를 계획하며 기대에 부풉니다. 하지만 진정한 여행의 가치는 계획된 일정이 아니라, 과정에서 마주치는 예기치 않은 순간들에 있습니다. 마르틴 부버의 말처럼, 모든 여행에는 여행자가 미처 알지 못하는 ‘비밀스러운 목적지’가 존재합니다.


여행 중 우리는 가끔 지도에도 없는 장소에서 특별한 감동을 경험합니다. 유명한 관광지보다 골목길의 작은 카페에서 더 깊은 여운을 남기는 대화를 나누거나, 예상치 못한 길을 걷다가 평생 잊지 못할 풍경을 만나는 일도 있지요. 길을 잃었을 때 오히려 새로운 아름다움을 발견하기도 하고, 우연히 들른 가게에서 뜻밖의 인연을 만나기도 합니다. 이런 순간들이야말로 여행의 진정한 의미를 만들어 줍니다.


이 ‘여행의 비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마르틴 부버의 철학과 그가 말하는 ‘우연’의 의미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부버는 인간관계를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합니다. 하나는 ‘나-그것(I-It)’ 관계로, 상대를 단순한 대상이나 객체로 바라보는 태도입니다. 바쁜 일상 속에서 무심코 사람들을 지나치며 형식적인 인사만 나누는 모습이 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나-너(I-Thou)’ 관계로, 상대를 온전한 존재로 인정하고 깊이 집중하는 태도입니다. 누군가와 진솔하게 대화를 나누며 서로에게 공감하고 이해를 구하는 경험이 바로 ‘나-너’ 관계에 해당합니다.


부버에 따르면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과 사물, 사건은 궁극적으로 ‘나-너’ 혹은 ‘나-그것’ 관계로 나뉩니다. 중요한 점은, 내가 상대나 대상을 어떤 관계로 대하느냐에 따라 ‘나’ 역시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만약 상대를 단순히 ‘그것’으로 바라본다면, 나도 그 관계 안에서 기능적 존재로 남을 것입니다. 반면 상대를 온전히 ‘너’로 인정하고 소통하려 한다면, 나 또한 더욱 온전하고 깊이 있는 존재로 변화할 수 있습니다. ‘나-너’ 관계는 타인이나 대상만이 아니라 나 자신까지 변화시키는 힘을 지닌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관계 맺기의 원리는 여행에서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여행을 그저 ‘관광’으로만 본다면, 우리는 장소를 소비하고 지나칠 뿐입니다. 그러나 여행 중 만나는 풍경과 사람들을 ‘너’로 대한다면, 그 순간과 깊이 연결되어 내면의 변화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낯선 곳에서 일어나는 우연한 만남이나 예상 밖의 사건이 우리를 성장시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결국, 여행의 진정한 의미는 새로운 장소를 방문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을 통해 ‘나’가 변화하는 데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 있습니다.


부버는 우리 삶에서도 중요한 변화가 철저한 계획이 아니라 우연한 만남 속에서 비롯된다고 말합니다. 예상치 못한 순간이야말로 ‘나-너’ 관계를 형성할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길을 가다 우연히 만난 사람이 인생의 멘토가 될 수도 있고, 예기치 못한 실패가 더 큰 성장의 발판이 될 수도 있지요. 우리가 이 ‘우연’을 ‘나-그것’으로 바라보면 별다른 의미를 얻지 못하지만,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응답(response)’한다면 그것이 삶을 바꾸는 전환점이 될 수 있습니다. 이는 곧 ‘존재의 현재성(Presence)’, 즉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경험하고 마주치는 모든 만남과 사건에 진심으로 응답하는 태도와 연결됩니다.


우리는 종종 삶의 모든 국면을 꼼꼼히 계획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부버가 강조하듯, 삶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들은 우리가 계획하지 않은 곳에서 찾아옵니다. 여행뿐 아니라 인생의 여정에서도, 예상치 못한 우연 속에서 우리는 성장하고 변화합니다.


결국 여행이든 삶이든, 미리 알지 못했던 ‘비밀스러운 목적지’는 언제나 존재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순간 속에서 나타나며, ‘나-너’ 관계를 통해 더욱 깊은 의미를 갖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목적지’를 정하는 일이 아니라, 과정에서 마주치는 예기치 않은 순간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응답하느냐입니다. 열린 마음으로 응답할 때 우리는 비로소 ‘진짜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인생에서 예상치 못한 ‘비밀스러운 목적지’는 무엇이었나요? 앞으로의 여정에서도 열린 마음으로 어떤 새로운 경험을 받아들일 수 있을지 고민해 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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