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꽃

by 정지영
사랑이여, 너야말로 진정한 생명의 꽃이며, 휴식 없는 행복이다.(괴테)


더운 여름날,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오후에 창문 틈새로 바람 하나가 스며듭니다. 하얀 커튼이 살랑살랑 흔들리는 작은 방안에는 갓난아기가 누워 있습니다. 분홍색 이불 위에 누운 아기는 작은 주먹을 꼭 쥐고 있고, 동그란 볼이 복숭아처럼 말랑말랑해 보입니다.


바람은 깃털처럼 가볍게 떠다니며 예쁜 아기의 볼을 살며시 쓰다듬습니다. 아기는 바람의 시원한 손길을 느끼며 까만 눈동자를 반짝이고 입꼬리를 올려 환한 미소를 짓습니다.


잠시 후 나이 지긋한 할머니가 방문을 열고 들어옵니다. 회색 머리를 뒤로 곱게 빗어넘긴 그녀의 얼굴에는 깊은 주름이 패여 있습니다. 바람은 얼른 방 한켠 벽 모서리로 몸을 숨깁니다.

힐머니는 웃고 있는 아기를 내려다보며 안타까운 목소리로 중얼거립니다.


"쯧쯧.... 불쌍한 것.... 제 어미가 어찌 된 줄도 모르고...."


그녀의 깊은 한숨이 좁은 방안을 무겁게 채웁니다. 아기의 엄마는 아기를 낳다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아기 엄마 대신 외할머니가 이 작은 생명을 키우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불행을 모른 채 벙긋벙긋 웃고 있는 아기의 모습이 더욱 애틋하고 가련하게 느껴집니다.

방 한켠에 숨죽이고 있던 바람이 할머니의 한숨과 하나가 됩니다. 그리고 다시 창문 틈으로 조용히 빠져나갑니다.


그날 이후로 바람은 날마다 아기를 찾습니다. 매일 오후 두 시쯤이면 어김없이 창문을 통해 스며들어, 불쌍한 아기의 볼을 시원하게 쓰다듬어 주며 지금껏 느껴보지 못한 사랑과 행복의 충만함을 느낍니다. 아기는 바람의 부드러운 손길이 닿을 때마다 작은 손을 펄럭이며 어여쁜 미소로 화답합니다.


그러나 둘의 사랑은 오래 가지 못합니다. 여름이 지나고 가을바람이 되면서 바람의 몸속에 차가운 기운이 들기 시작하자, 아기의 할머니가 문과 창문을 꼭꼭 걸어 잠그기 시작합니다. 바람은 늘 닫힌 창문 밖에서 유리창 너머로 아기를 바라보다가 먹먹해진 마음을 안고 되돌아갑니다.


'할머니! 절 막지 않아도 괜찮아요. 아기가 감기라도 걸리면 안 되는 건 저도 그걸 알고 있어요. 전 단지 햇살 좋은 날 잠시 동안만이라도 아기를 살포시 어루만질 수 있으면 돼요.'


바람은 창가에서 애타게 속삭이지만 할머니는 듣지 못합니다.


다시 시간이 흘러 겨울이 옵니다. 나뭇가지마다 하얀 눈이 쌓이고 땅은 꽁꽁 얼어붙습니다. 바람은 겨울의 차가운 기운으로 가득 찹니다. 바람은 자신의 존재가 아기에게 해롭다는 사실이 너무나 괴롭습니다. 그토록 행복했던 순간을 함께 했던 그 아기에게 다가갈 수 없게 변해 버린 자신이 너무나 밉습니다.


'내가 따뜻한 봄바람이 될 수만 있다면... 그러면 다시 아기를 만날 수 있을 텐데...'


바람은 매일 밤 이런 간절한 소망을 품고 긴 겨울을 견딥니다.


이듬해 이른 봄날 아침, 아기 방 창문을 열어 본 할머니는 화들짝 놀랍니다.


"어머나, 이렇게 신기한 일이 있나? 창문에 꽃이 피었네. 아직 봄꽃 소식은 이르지 않았나? 그런데 이 꽃을 보니 공연히 네 엄마 얼굴이 떠오르는구나...."


할머니는 이제 돌이 다 된 아기를 품에 안고 꽃 앞에 섭니다. 약하게 부는 봄바람에도 살랑살랑 흔들리는 하얀 바람꽃 한 송이가 창가에 피어 있습니다. 할머니는 꽃을 신기하게 바라보다가 오랜만에 환하게 웃습니다.

아기도 하얀 꽃잎을 보며 어느 때보다 환하게 웃습니다. 그 순간 따뜻한 봄바람이 살며시 창문을 통해 들어와 아기의 볼을 부드럽게 쓰다듬습니다.


바람꽃이 된 바람의 작은 소망이 마침내 이루어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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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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