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A]이성적 사랑, 자살과 코나투스에 대하여

by 정지영

김도환 님께서 올리신 질문 잘 보았습니다. 스피노자 철학에서 중요한 부분을 건드리고 있는 질문입니다. 그래서 답글 형식으로 답변하려다가 독립된 게시물로 답을 드리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마 사랑은 이성이랑 감정중에 감정에 해당되겠죠? 갑자기 이성적인 사랑이란 존재하는가에 대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자살하는 사람들은 코나투스가 부족했던 건지, 존재를 몰랐던 건지, 외면했던 건지 궁금해지네요. 글 감사합니다.


1. 이성적인 사랑은 존재하는가?: 사랑에 대한 스피노자의 관점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스피노자의 관점에서 '이성적인 사랑'은 존재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추구할 수 있는 가장 완전하고 자유로운 형태의 사랑입니다. 질문자님의 생각처럼,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사랑은 대부분 '감정' 즉, 스피노자의 용어로는 '정념(passio, 수동적 정서)'에서 시작됩니다.


'정념으로서의 사랑'에 대해 설명해 보겠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만났을 때, 그 사람으로 인해 나의 '생명력 게이지'(활동 능력)가 올라갈 수 있습니다. 이렇게 활동능력이 증대되면 우리는 '기쁨'을 느낍니다. 그리고 그 기쁨의 원인이 그 사람에게 있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사랑'에 빠졌다고 말합니다.


이런 사랑은 그 원인이 외부에 있습니다. 즉 내게 원인이 있지 않고 사랑하는 대상에 원인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감정은 외부 원인에 의해 좌우되는 수동적인 상태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 내 기쁨과 슬픔이 결정됩니다. 그래서 이런 사랑은 강력하지만, 동시에 불안정하고, 나아가 우리를 그 감정에, 그 감정의 대상에 예속시킬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랑은 이러한 정념으로서의 사랑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성적인 사랑'도 있습니다. 이는 정념으로서의 사랑이 수동적인데 반해 능동적인 사랑입니다. 이성적 사랑이라고 하면 감정을 배제한 차가운 계산의 산물인 것처럼 오해할 수 있지만 아닙니다. 이 사랑은 '이해에 기반한 사랑'입니다. 이는 상대방을 '적합한 관념'으로, 즉 그의 본질을 명확하게 이해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왜 그를 사랑할까요? 그의 외모나 재산, 혹은 나에게 주는 일시적인 쾌감 때문이 아니라, 그의 덕(virtue), 즉 그의 고유한 본질과 능력을 명확히 이해하기 때문에 사랑합니다. 그의 존재 자체가 나의 존재를 긍정하고, 나의 이성과 능력을 증진시킨다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또한 이 이성적인 사랑은 일방적 의존이 아닌 상호적 성장을 가져옵니다. 이성적인 사랑에서 상대방은 더 이상 내 기쁨의 '외부 원인'만이 아닙니다. 나와 마찬가지로 고유한 코나투스를 가진 존재임을 이해하고, 그의 능력이 증진되는 것(그의 기쁨)을 나 자신의 기쁨으로 여기게 됩니다. 나의 능력을 증진시키는 사람을 사랑하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능력이 증진되도록 돕는 것. 이것이 바로 '상호적 능력 증진'으로서의 이성적 사랑입니다.


그리고 이성적인 사랑은 자유로운 사랑입니다. 이러한 사랑은 상대방의 인정이나 변덕에 쉽게 흔들리지 않습니다. 우리의 사랑이 외부 조건에 대한 맹목적인 반응이 아니라, 서로의 본질에 대한 명확한 이해 위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스피노자의 관점에서 사랑은 '감정'에서 시작될 수 있지만, '이성'을 통해 더 깊고 안정적인 차원으로 성숙할 수 있습니다. 감정적인 사랑이 우리를 예속시키는 정념이라면, 이성적인 사랑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능동적인 활동입니다.



2. 자살과 코나투스: 존재의 노력이 꺾이는 순간에 대하여

이것은 매우 중요하고 민감한 질문입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자살하는 사람은 코나투스가 부족했거나, 그것을 외면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의 코나투스가 그 자신보다 훨씬 더 강력한 외부의 힘에 의해 압도당하고 왜곡된 결과라고 보아야 합니다.


스피노자의 『에티카』에는 다음과 같은 중요한 명제가 있습니다. "사물은 외부의 원인에 의하지 않고서는 파괴될 수 없다." 에티카 3부의 정리 4에 나오는 말입니다. 코나투스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코나투스는 존재의 본질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존재는 살아있는 한, 코나투스가 언제나 작동합니다. 따라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행위는 자신의 코나투스(존재하려는 노력)가 갑자기 사라져서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문제는 압도적인 슬픔과 무력감과 같은 외부의 원인들입니다. 극심한 고통, 사회적 고립, 깊은 절망감, 트라우마, 혹은 뇌의 화학적 불균형 등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이러한 외부의 힘들(스피노자의 용어로는 '양태들')이 한 개인에게 지속적으로 작용하면, 그의 '생명력 게이지'는 끊임없이 떨어집니다. 즉, 그는 압도적인 '슬픔'의 상태에 놓이게 됩니다. 스피노자에게 슬픔은 '능력이 감소하는 과정'이므로, 이 상태에서 개인은 생각하고, 행동하고, 저항할 힘(코나투스의 표현)을 대부분 잃어버리게 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비극이 발생합니다. 존재를 지속하려는 힘인 코나투스마저도, 이 압도적인 외부의 힘과 그로 인한 '부적합한 관념(왜곡된 생각)'에 의해 방향을 잃고 왜곡됩니다. 그는 '이 고통을 끝내는 유일한 방법은 존재를 멈추는 것'이라는 잘못된 관념에 사로잡힙니다.

이때, 죽음을 선택하는 행위는 삶을 포기하려는 의지라기보다, 견딜 수 없는 고통이라는 더 낮은 완전성의 상태에서 벗어나려는 마지막 노력처럼, 비극적으로 왜곡된 코나투스의 발현이 됩니다. 외부의 힘이 너무나 강력하여, 존재하려는 본질적인 힘마저도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 방향으로 틀어버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스피노자의 관점에서 자살은 개인의 '의지박약'이나 '나약함'의 문제가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한 개인이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외부의 힘에 의해 그의 존재 전체가 내몰린, '정념의 예속'이 낳은 가장 비극적인 결과입니다. 이는 우리에게 개인에 대한 비난이 아닌, 그를 둘러싼 외부 환경과 관계에 대해 더 깊이 성찰해야 한다는 과제를 남깁니다.



좋은 질문 감사합니다. 덕분에 그냥 지나칠 수도 있었던 중요한 문제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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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영 인문・교양 분야 크리에이터 직업 교사 프로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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