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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니작가 Oct 26. 2020

울어, 울어봐... 제발!

슬픈 상황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다.


"눈물 안 나와? 슬픈 생각을 해봐! 최근에 엄마한테 혼난 적 없어? 슬픈 장면을 생각하고 거기에 집중하고 울면 돼!!! 우는 연기는 기본이야!"

오늘도 혼났다. 난 왜 이렇게 우는 연기가 힘들까?...

다른 친구들은 컷 소리와 함께 연기에 몰입하면서  잘만 우는데 난 울음을 쥐어짜도 안 나온다. 엄마한테 혼날 때는 그리도 펑펑 울면서.


연기에 관심이 생겼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어린이 신문을 보다가  연기학원에서 아역 탤런트 지망생 모집공고를 발견했다. 엄마한테 막무가내로 졸랐다. 무조건 오디션을 보고 싶다고 했다. 신생 학원이라 오디션을 본 후 가능성이 있는 학생들은 무료교육을 해준다는 말에 솔깃했다. 정말 좋은 기회였다. 여의도에 위치한 학원에 도착하니 역시나 지원자들이 많았다. 이 경쟁률을 뚫을 수 있을지 걱정이 됐다. 연기 대본을 나눠줬다. 오디션 전까지 남동생과 계속 연습했다. 이미 남동생도 온 김에 같이 봤다. 생각보다 떨리지 않았다. 나는 합격하고 남동생은 떨어졌다. 이렇게 우연한 기회로 연기를 배우기 시작했다. 잠실에서 여의도까지 일주일에 한 번 수업을 들으러 혼자 다녔다. 좌석버스 30번을 타고 한 시간은 가야 했다.  이날은 오전부터 오후까지 하루 종일 연기 공부하는 날이었다.

 첫 수업에 갔다. 티브이에서 나오는 탤런트를 직접 본 건 처음이었다. 어린이 드라마  '꾸러기'에서 덩치 큰 겁쟁이 친구로 나오는 분이었다. 선생님은 우리의 눈높이에 맞게 재밌게 수업해 주셨다. 하지만 실수를 해서 혼날 때는 정말 무서웠다.  매주 갈 때마다  대사를 완벽하게 외워야 하는데 처음에는 쉽지 않았다.  계속 반복해서 외우다 보니 이건 어느 정도 극복을 했는데 문제는 바로 '우는 연기'였다.  웃고 화내고 소리치는 연기는 항상 칭찬받았다. 하지만 우는 연기만은 너무 힘들었다.

"가장 슬픈 일을 생각해봐. 지금까지 그런 일이 없었으면 슬픈 일이 생겼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리고 그 감정을 가지고 연기를 해봐... 울음은 쥐어짜면 감정이 전달이 안되니까.. 그 역할에 완전히 몰입해야 돼."

그때의 난 생각 없이 행복한 아이였다. 우는 연기가 힘들어서 연기를 그만둬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연기가 재밌었다. 이미 시작한 거 제대로 해보고 싶었다. MBC 청소년 드라마 '푸른 교실' 오디션이 잡혔다. 우리 학원에서 한 명을 선발한다고 했다. 연기 잘하는 친구들이 많았지만 도전해보고 싶었다.

'그래 이번에 무조건 방송국 가보자! 제발 울자! 울어보자.. 음.. 난 엄마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 잘 때도 엄마가 내 옆에 있어야 하니까.  그런데  울 엄마가 만약에 불치병에 걸리면 난 정말 슬플 거 같아.. 엄마가 지금 내 옆에 없으면... 하늘나라로 간다면...'

이런 슬픈 생각이 계속 나면서 난 그냥  주저앉아 울었다.  

이젠 우는 연기를 할 때 슬픈 상황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바로 감정을 잡고 울면서 대사를 했다. 처음으로 선생님에게 칭찬을 받았다.

"수도꼭지 틀어놓은 거처럼 잘 우네! 이렇게만 하면 이번에 좋은 결과 있을 거야!"

이런 식으로 준비하면 오디션은 승산이 있었다. 어떤 연기가 나에게 주어질지 전혀 모르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더 열심히 준비했다.


드디어 오디션 날이다. 내 인생 첫 방송국 오디션을 위해서는 먼저 학원 오디션을 통과해야 했다. 면접장에 들어갔다. 간단하게 자기소개를 한 후 공통 연기를 했다. 이 연기는 수천 번을 연습해서 자신 있었다.

" 엄마. 엄마가 내 마음을 알아? 엄마가 나한테 해준 게 뭐 있어? 다른 친구들은  아무런 걱정 없이 잘만 사는데  왜 우리 집은 허구한 날 이 모양 이 꼴이야! 난 싫어, 가난이 싫어. 가난이 싫단 말이야!"

무려 30년이 넘었는데 지금도 이렇게 생각이 난다. 이제 드디어 마지막 관문이 남았다. 한 면접관이 이렇게 상황을 제시했다.

" 지금 이렇게 소리를 지르고 집을 나왔잖아.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엄마가 많이 아픈 걸 알게 된 상황이야. 그걸 연기하면 돼"

화내고 소리 지르다가 이젠 완전히 다른 감정을 잡아야 했다. 내가 울 때 항상 생각했던 부분이었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풀썩 주저 않아 울면서 대사를 했다. 이땐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전혀 기억이 안 난다. 그냥 생각나는 데로 몰입해서 했던 거 밖에는...

우는 연기로 합격했다. 드디어 방송국에 입성한다니 꿈만 같았다. 그렇게 나를 힘들게 했던 우는 연기 덕에 오디션의 기회를 잡았다. 그때 깨달았다.

정말 노력하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것을.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하면 좋은 결과가 있다는 것을.



이미지 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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